신(新)동지회, 건국의 숨결이 머문 이화장을 방문하다.
- Grace 은혜 Kim

-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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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5일 전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위치한 이화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초기 내각을 구성할 때 사용하던 집무 공간이다. 광복 이후 국가 체제가 확정되지 않았던 혼란기,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기본 노선이 구체화된 정치적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이화장은 ‘건국의 집’이라 불릴 만하다.
3·1운동 107주년을 맞아 백서스정책연구소의 후원조직인 신(新)동지회 회원들이 이화장을 찾았다. 이날 방문은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공간을 직접 확인하며 느낀 것은 하나였다. 건국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결단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은 독립을 외친 민족적 항거였을 뿐 아니라, 공화정의 원리를 천명한 사건이었다. 그 정신은 상해 임시정부로 이어졌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또한 이 시기에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선언은 시작일 뿐이었다. 실제 영토와 정부, 국민을 갖춘 주권 국가를 세우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과제였다.
1945년 10월 귀국한 이승만은 이화장에 머물며 정국 구상에 들어갔다. 당시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된 상태였고, 좌우 이념 대립은 극심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로 치달았고, 북에서는 이미 공산 정권 수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체제로 국가를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정치 노선의 차원을 넘어선 생존의 문제였다.
이승만은 국제연합(UN)을 통한 총선 실시를 주장했고, 그 결과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가 실시됐다. 국제 감시 아래 치러진 이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통성이 확보되었다.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출발이었다.

이화장 경내에는 ‘조각당’으로 불리는 건물이 있다. 정부 수립 직후, 이곳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내각 구성이 이루어졌다. ‘조각(組閣)’이란 내각을 조직한다는 의미다. 초대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 인선이 논의·확정되며 행정부의 기본 틀이 갖춰졌다.
오늘날 대한민국 행정부 체계의 출발점이 바로 이 자리다. 재정, 외교, 국방, 내무 등 국가 운영의 핵심 부처들이 형성되고, 헌법에 따른 책임 정부의 구조가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건국은 선언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구체적 조직과 제도의 정비를 통해 현실이 되었다.
화려한 궁정이나 웅장한 관저가 아니라, 한 지도자의 사저에서 국가 행정부의 골격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건국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화장 조각당은 상징이 아니라 실질적 행정의 출발점이었다.

조각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휘호, “一統北守(일통북수)” → “하나로 통일하여 북쪽을 지킨다” 또는 “통일하고 북쪽을 수호하다” 이승만의 정치적·이념적 맥락에서 보면, 남한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통일(하나로 모으고)한 뒤, 북쪽(북한·공산 세력)으로부터 국가를 방어·수호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1948년 8월 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열흘 앞두고 촬영된 초대 내각 기념 사진에는 건국 행정부의 핵심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운데에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그리고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이 자리해 정부 수립의 중심을 이뤘다. 앞줄에는 전진한(사회), 임영신(상공), 안호상(문교), 윤치영(내무), 김도연(재무), 조봉암(농림), 장택상(외무) 등 각 부 장관들이 배석해 행정부의 골격을 보여준다. 특히 임영신 장관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으로 기록되며 건국 정부의 상징적 의미를 더한다.
뒷줄에는 윤석구(체신), 김동성(공보), 민희식(교통), 유진오(법제), 이인(법무) 등 정부 실무와 법제 기반을 담당한 인사들이 함께했다. 유진오는 제헌헌법 기초 작업의 핵심 인물로, 정부 수립이 헌법 질서 위에서 이뤄졌음을 상징한다.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 정책의 토대를 마련하며 건국 초기 사회경제 개편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 사진은 이화장 조각당에서 구성된 내각 구성이 실제 정부 조직으로 구현되었음을 보여주는, 자유대한민국 출범의 상징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건국과 新命舊邦(신명구방)의 실현 (1945~1960)
1945년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제헌국회에서 초대 내각을 구성한 이화장 조각당에 그는 “新命舊邦(신명구방)” 현판을 걸었다. 이는 오래된 민족(舊邦)에 하나님께서 새 사명(新命)을 주셨다는 그의 신앙 고백이었다. 그는 국가 의례를 기독교식으로 바꾸고, 군·교도소에 군목·형목 제도를 도입했으며, 기독교인들을 주요 직위에 등용했다. 6·25전쟁 중에도 그는 기독교 구호단체를 통해 원조를 받았고, KNCC(한국기독교연합회)를 경유해 배분하도록 했다.
그의 집권기(1948~1960) 동안 정부 고위직 38%, 국회의원 21%가 개신교 신자였으며, 한국 교회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하야와 망명, 그리고 마지막까지 (1960~1965)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은 이화장으로 돌아왔다가 하와이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에서도 그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려 했던 꿈을 놓지 않았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하기 전, 그는 측근에게 “나는 평생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의 장례는 국립묘지에서 치러졌고, 이화장은 그의 신앙과 건국 정신을 기리는 공간으로 남았다.이승만의 삶은 단순한 정치인의 기록이 아니다. 한성감옥의 죽음 직전 기도에서 시작된 예수 만남은 그를 “新命舊邦”의 사명을 평생 짊어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오래된 민족 위에 새롭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명 — 자유·평등·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그것이 우남 이승만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었다.

이화장 안채는 이승만이 1947년부터 거주한 실제 생활 공간으로, 건국 전후의 시간을 보낸 장소다. 이곳은 공식 회의장이기보다는 거처이자 접견 공간으로, 국내외 인사들이 방문해 면담을 나누던 사적인 공간에 가까웠다.
정부 수립과 관련한 상징적 논의의 중심이 조각당이었다면, 안채는 그 모든 정치적 긴장과 결단을 일상 속에서 떠안고 있었던 자리라 할 수 있다. 벽난로와 입식 가구가 놓인 내부 구조는 전통 한옥의 틀 안에 서구식 생활양식이 결합된 근대적 공간의 특징을 보여준다.
1960년 4·19 이후 하야 직전까지 머물렀던 곳 역시 이 안채다. 이후 하와이로 떠나기 전 마지막 시간을 보낸 장소이기도 하다. 훗날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귀국해 여생을 보낸 곳 또한 이 안채였다.
이곳에 보존되어 온 집기와 문서, 사진 자료 등은 단순한 생활 유품이 아니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사적 삶과 공적 시대가 교차한 흔적이다. 현재 일부 유물은 보존과 복구를 위해 대통령기록관에 임시 이관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이는 건국 초기의 생활사와 정치사를 함께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안채는 화려한 권력의 공간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무게를 고요히 감당했던 거처였다. 건국은 조각당에서 제도화되었지만, 그 고민과 사색은 이 안채의 조용한 방 안에서 이어졌을 것이다.

이화장 마당에 놓인 흰색 벤치는 이승만이 직접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나무 의자다. 겉모습은 단순하지만, 대통령 신분에도 손수 나무를 다듬고 못을 박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생활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적 유품으로 평가된다. 그는 젊은 시절 해외 체류와 망명 생활을 오래 경험했기에, 스스로 생활을 해결하는 데 익숙했다는 증언들이 남아 있다. 이 의자는 그러한 자립적 성향과 실용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또한 이 의자는 단순한 휴식용 가구를 넘어, 마당에서 사색과 대화를 나누던 공간의 일부였다. 방문객이나 측근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조용히 뜰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던 자리로 전해진다. 현재의 흰색 모습은 오랜 세월 야외에 놓이며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보존 조치의 결과다. 원래는 나무 질감이 드러난 형태였으나, 부식 방지를 위해 도색하여 관리되고 있다.
안채와 조각당이 국가적 결단의 공간이었다면, 이 작은 의자는 건국 대통령의 일상적 인간성을 보여주는 물건이다. 거창한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검소함과 자립을 드러내는 소박한 흔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화장 내의 ‘통일기원관(統一祈願館)’은 원래 경비 인력이 머물던 건물이었다. 1960년 4·19 이후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현 청와대)를 떠나 이화장에 거주하던 시기, 경찰 경비 인력이 상주하며 근무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훗날 이화장이 기념관으로 정비되면서 이 건물은 ‘통일기원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분단 현실 속에서 통일을 염원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명칭이다. 건물 외부에 세워진 현판은 그 의미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공간과 관련해 ‘경천애인(敬天愛人)’과 '일통북수'(一統北守)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쓴 친필 휘호 ‘경천애인’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기독교 신앙과 전통적 윤리관이 결합된 가치로 해석된다.이 휘호는 그의 후기 사상(1950년대 중반~1960년)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통일은 반드시 이루되 현재는 북쪽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면서 민족 통합을 준비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체제를 확정한 지도자였다. 공산주의가 광풍처럼 한반도를 휩쓴 시대에하나님께서 주신 명철과 지혜로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고, 국제사회 속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대한민국은 이후 6·25전쟁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지만, 체제의 방향은 유지됐다. 개인의 자유, 시장경제, 법치주의라는 기초 위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다. 오늘의 번영은 건국 당시의 체제 선택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3·1운동 107주년, 우리 신(新)동지회는 이화장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독립의 선언이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듯, 오늘의 대한민국 또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국제 질서의 변화, 안보 환경의 긴장, 가치 혼란, 주권 상실 속에서 국가의 정체성과 방향을 재확인해야 할 시점이다. 이화장은 말없이 증언한다. 대한민국은 우연히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분명한 선택과 결단 위에 탄생한 국가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선택은 자유를 향한 것이었다는 점을. 건국의 숨결이 머문 자리, 이화장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자유대한민국의 다음 장을 우리는 어떤 책임과 각오로 써 내려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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