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작성자 사진청천

러시아 공산 혁명을 주도한 일루미나티와 유물론




1830년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upt)는 인간과 신에 대한 개념을 세워 프리메이슨 철학의 근간으로 삼았다. 후에 니체가 이것을 받아들여 체계화 한 후 세상에 발표했으며, 이것이 다시 파시즘(Fascism)과 나치즘(Nazism)의 근간이 되었다.


프랑스에서의 일루미나티 활동을 살펴 보면, 범법자로서 망명해 왔다는 점을 강조한 ‘파리 범법자동맹’이 있었고, 그 산하 조직으로 ‘공산동맹’(kommunistische Internationale)이 있었다. 특히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프랑스로 유학 와 있던 중 본 조직에 가입하였다.

당시 공산주의는 일루미나티 회원들 중에서도 혁명적 경향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용어였으며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이 일루미나티는 프랑스 혁명 뿐 아니라 ‘러시아 공산 혁명’에도 관여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공산혁명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노동자와 농민을 너무 탄압하고 돌보지 않은 나머지 굶주림을 못 이겨 일어난 자연 발생적인 반정부 폭동이었고, 그것이 공산혁명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는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그 진실과 펙트는 따로 있다.

1814년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와 전쟁을 할 때 파리를 점령한 러시아 장교들은 일루미나티 사상과 접하게 된다. 귀국한 후 이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에는 ‘북극성종단’(the polar star)과 ‘남극성 종단’(the South Pole star) 이 두 개의 프리메이슨 종단이 탄생하게 된다. 이들은 수많은 부호들과 상류층 사람들을 입단시켰다.


‘3면 작전’을 저술한 얀 코자크(Jan Kozak)는 공산혁명 당시 러시아에는 3개의 세력이 있었다고 전한다. 첫째는 러시아의 황제(차르*Tsar)의 권위를 박탈한 임시정부, 둘째는 이를 뒤에서 조종하는 수많은 프리메이슨 계열 조직중 하나인 ‘브나이 브리스’(Bnai Brith /1882년 창설)종단,

셋째는 행동대라 할 수 있는 조직폭력배가 그 세력들인데, 이중 전체를 통솔하는 세력은 비밀조직이었다고 전해진다. 영국군 첩보장교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전문가인 존 콜먼(John Coleman)박사는 1997년 그의 저서 ‘The Committee of 300’에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주요 공격 목표는 기독교였으며 레닌, 트로츠키, 케렌스키의 배후에는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들을 완전히 조종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가진 강력한 조직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임시정부의 우두머리로 사회주의자였던 알렉산더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 /1881-1970)는 ‘브나이 브리스’ 단원이었으며 조직 폭력배들의 중심은 사회민주노동당의 ‘블라디미르 레닌’ 이었다. 한편 이들은 러시아 공산 혁명에 가장 앞장섰던 순수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 파에 대해서는 일단 혁명에 성공한 후 대부분 숙청 또는 유배를 보냈으며 이후 레닌파가 권력을 인계 받아 악정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공산주의는 헤겔의 변증법과 다윈의 진화론 등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이나 신이 없이도 물질 스스로 존재하고 진화 할 수 있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다. 유물론은 정신세계를 일체 부정하고 종교, 양심, 도덕, 기존의 가치 등을 전면 부인하고 오직 혁명사상을 전파하며 동물적으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주의이다.


이런 사상과 이론 체계로 형성된 러시아,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 국가들로 인해 현재 전 세계가 참으로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다.


공산주의는 무신론 사상이며 종교 말살론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을 노예로 만드는 아편”이라고 말했으며, 레닌은 “현대 종교 특히 기독교는 노동 계급에 대한 억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전제 한 뒤 “교회는 노동자, 농민, 무산 대중의 원수이기 때문에 교회부터 파괴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형 교회부터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1776년 5월 1일 일루미나티 창시자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했던 말과 동일하다.

"우리의 비밀을 밝힌다. 우리가 유일무이한 종교를 가진 척 했던 것은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악한 자가 악한 일을 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듯 현자도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는 비밀결사에 의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다. 이 교단의 특별한 목표는 기독교를 말살하는것이고 모든 시민정부를 전복하는 것이다."


엥겔스는 “정신은 물질의 생물학적 부산물”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그는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간을 물질로 구성된 고깃덩어리로만 보았다. 이외에도 구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는 서기장이 된 후 “3년 안에 크리스천들을 다 없애고 마지막 한 사람 남은 것을 전국 TV에 보여 준 후 처치하여 크리스천들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학살을 저질렀다. 후버 연구소의 러시아 전문가인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박사는 그의 저서 `The Great Terror(엄청난 폭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6년 2월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폭로하기를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들 중 90%를 죽였고 그 후에 입당한 사람은 50%, 군 장성 급의 60%를 처형했다”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소련은 귀족 및 군인, 지식인의 저항에 부딪쳐 국내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 때 히틀러가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켜 1941년 6월 바바로사(Barbarossa)계획에 의해 소련을 침공함으로 스탈린의 공산혁명 완성을 결정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스탈린은 혁명에 저해가 되는 사람들을 애국이란 명분으로 징집하여 전선(戰線)으로 몰아넣어 전부 죽게 만들었다. 모스크바 전투시기였던 1941년 6월 22일부터 11월 말까지 단일 전투에서 400~500만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제일 먼저 총알받이가 된 사람들은 혁명의 방해가 되는 모스크바 인사들이었다.


소련은 2차대전 시 군인 750만명 전사, 군인 부상 1400만, 1500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때 자연스럽게 방해가 되는 계층을 다 제거(除去)했다.

에조프를 내무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여 1936년 부터 1939년 까지 제일 큰 위협인 군대를 제거했다. 1937년 6월 2일에는 폴란드 전쟁 영웅이며 소련군 건설의 1등 공신인 참모총장 두하체프스키 원수 이하 8명의 장군을 나치와 손잡고 스탈린에 대해 음모를 꾀했다는 죄명으로 처형했다.


혁명에 방해가 되는 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한 처형을 단행하였다. 그는 소위 ‘에조프시치나’라고 불리는 대학살로 세계를 경악시켰다.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은 계속되어 5천명이 넘는 고급장교가 처형되었다.


5명의 원수 중에서 3명, 5명의 군사령관 중에서 13명, 85명의 군단장 중 57명, 195명의 사단장 중 110명, 406명의 여단장 중 220명이 처형되었다. 혁명에 방해가 되는 군부의 고급 장교들을 두하체프스키 원수(元帥) 의 죄목에 뒤집어 씌워서 처형했다.


중국에서도 공산주의의 대학살은 일어났다. 1948년 장개석 군대가 모택동에게 패한 후, 대만으로 탈출 못하고 본토에 남아 있는 옛날 장개석 총통의 군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공산혁명의 저해요소로 한국전이 발발하자 이 군인들 20만을 소집하여 한국전에 투입했다. 어떻게 하면 명분 있게 다 죽일 수 있을까? 그들이 택한 것이 바로 ‘인해전술’이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UN군의 지뢰밭과 화망(火網)지역을 사람으로 바다를 만들어 공격을 하는 전술이다.

혁명의 방해요소인 장개석 군대의 국부군 출신을 항미(抗美)전쟁이라는 구실로 자연스럽게 제거했다.


그 후 모택동은 전 세계가 경악한 홍위병의 문화혁명을 일으켜 공산주의 혁명의 적대 세력인 지식층을 10대와 20대 초반의 공산주의 맹신자를 동원하여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하였다.

폭력과 체형 및 체벌 학대 행위를 자행하고 대상자를 비참하게 참살하였다.


가난한 자의 지식인과 가진 자에 대한 투쟁은 항구적으로 계속되어야 하며, 이것은 전쟁으로 발전한다는 칼 막스의 계급투쟁 정의를 철저히 이행했다. 이때 피해를 입은 인사와 처형된 사람이 10만을 넘고 투옥(投獄) 및 고문으로 불구가 된 인사가 2억에 이른다.

또 한국전쟁 시 김 일성은 6·25전쟁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될 때 남한 청년 40만 명을 강제로 징집하고, 각 감옥소에 수감되어 있는 우익 반공 죄수들을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낙동강 전선에 대거 투입하였다. 그들은 낙동강만 돌파하면 곧 전쟁이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사전에 혁명에 저해요소가 되는 인사들을 전선에 투입하여 자연스럽게 제거해 버리자는 저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다. 대한민국의 전 기존질서를 파괴하고 공산주의를 심기 위하여 소위 인민재판

(人民裁判)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북괴군이 가고 난 후, 후속해 온 치안부대는 각 마을마다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기본 질서를 철저히 파괴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여 불만이 있던 사람들 중에서 공산당에 동조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인민 위원회 위원장, 각종 연맹 위원장에 그들을 임명하였다.

당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학살 당한 인사가 128.968명, 어딘가 끌려가서 죽음을 당한 민간인 인사가 393.212명, 북으로 납치된 민간인 인사가 84.532명, 전쟁 중에 죽은 민간인이 244.633명이었다.


이와 같이 공산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질서를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기본질서를 파괴하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6.25에서 경험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대남 적화통일을 수행하려고 할 것이다. 북의 혁명 완수가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실천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에 우리는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하고 이를 직시(直視)해야만 한다.


우리는 캄보디아에서 소위 Killing Field때 폴 포트 정권이 혁명에 저해가 되는 인사를 250만이나 살해했다고 한심한 나라라고 흉을 본다. 우리가 뼈아픈 역사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남을 흉볼 수 있을까?

조회수 195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