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양심① ‘독일의 행동하는 양심’ 디트리히 본회퍼
최종 수정일: 2021년 5월 7일

신학을 삶으로 보여 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1945년 4월 9일)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 신학자, 반 나치운동가였다. 나치는 저명한 신학자인 동시에 열렬한 나치당원이었던 루트비히 뮐러의 주도 하에 독일 복음주의 교회 설립을 지원했다. 이 교회는 아리아족 중심으로 성경을 개작하고,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교회에서 추방, 나치와 히틀러를 칭송하는 데 앞장서는 만행을 저질렀다.
독일교회는 대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며 저항하기는 커녕, “하나님께서 영혼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 듯, 경제, 사회적 구원을 위한 히틀러가 그리스도라며 우상숭배했다. 이에 1935년 ‘바르멘 선언’을 통해 히틀러를 칭송하는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행각을 ‘마귀적’이라고 지탄했다.
1933년 27세 무렵 히틀러가 수상으로 권력을 잡자 그 이튿날 라디오에서 “히틀러를 우상으로 숭배할 수 없다, 그는 지도자가 아니라 오도자(misleader)다. 히틀러는 독일국민들을 히틀러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한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처럼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교회가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라고 경고하자 나찌의 방해로 방송은 중단되고 말았다.
독일 교회는 히틀러의 출현에 무기력 했고 나찌의 탄압과 음모, 음해가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다. 그의 생각과 신학은 진전되었고 나찌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을 더욱 강화했다. 그간 교회에서 배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개인 구원이었는데 그것을 버리고 악한 시대 속에서 성경 해석을 새롭게 시도했다.
“그리스도의 희생만 받아들이고 아무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이나 희생자에게 붕대를 감아 주는 것만이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마차가 사람을 치어서 다치게 했다면 희생자에게 붕대를 감아 주려고만 하지 말고, 마차의 바퀴에 뭘 끼워서라도 굴러가는 마차를 멈추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교회 갈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독교인으로 살 수 있는가? 본회퍼가 1939년 이후에 직면한 상황은 그러했다.
기독교인이라면 어찌해야 할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본회퍼는 한 때 이중첩자로 활동했다. 나치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발표한 원고를 신문에 싣자 나치의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나치에 반대하는 신학자 칼 바르트, 마르틴 니묄러와 함께 독일교회의 죄악된 모습을 참을 수 없었다. 1934년 히틀러의 비윤리적 사상에 반대하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고백교회 설립에 참여했다.
고백교회 참여자들 또한 박해를 받았고 본회퍼의 경우 1943년 4월 체포되어 2년간 수용소를 전전했다. 이때 그가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옥중서간》으로 출판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외국 첩보국(Abwehr)의 구성원에 의해 진행된 계획에 가담하였다. 1943년 3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결국 히틀러를 암살하려했다는 증거가 확보되면서,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 수용소(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에서40세의 젊은 나이에 히틀러가 죽기 1주일 전 암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죄다 사형시키라는 히틀러 명령에 따라 알몸으로 벌거벗겨진 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이 그의 신학이다.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유니온 신학교 교수이던 라인홀트 니부어가 신학 교수 자리를 마련한 뒤,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독일 국민들과 고난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독일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 때 그의 말이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실천하는 영성’이 긴급히 요구되고 있는 까닭 때문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란 유언을 남겼고, 그의 묘비엔 "디트리히 본회퍼–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 쓰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