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Alfred 정현 Kim

조선의 계집을 불쌍히 여긴 조선의 왕자

최종 수정일: 2024년 9월 3일







8월 15일, 대한민국의 광복절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8.15 정신'을 기리는 이날은 단순한 해방의 의미를 넘어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 그리고 건국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정신이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진 이승만의 사상과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조선의 마지막 세대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노예국가의 왕족에서 자유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그가 청년시절부터 노년까지 생애를 통해 보여준 자유민주주의와 자주국가 건설의 이상은 곧 8.15 정신의 근본적인 기초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조선 왕조의 몰락기,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조선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유교적 전통과 왕실의 권위를 체험하면서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당시 조선 사회의 쇠퇴와 무력함을 직접 목격하며, 나라를 개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사상이 필요함을 깨닫고 백성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이승만 정신이 자유대한민국에 중추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무엇보다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참여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가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1898년 한글로 창간된 '매일신문'을 통해 잘 드러난다.


새로운 시대의 서막: 최초한글신문 '매일신문' 창간

이승만은 조선의 어두운 현실을 누구보다도 명확히 보고 있었다. 부패한 정부와 외세의 압력 속에서 조선은 존립의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정작 백성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진실을 전달해줄 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신문들은 권력자들에 의해 통제되었고, 백성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채 살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결심했다. 그는 조선의 백성들이 진실을 알게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모아 하나의 힘으로 바꾸어줄 새로운 신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말보다 강한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바로 '매일신문'이었다.


1896년, 이승만은 완전히 한글로 만들어진 매일신문 창간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서재필 박사가 창간한 독립신문이 있었지만 완전 한글이 아니라 대다수의 백성들이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간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신문을 발행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로 뛰었고, 원고를 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당시 조선에서 100% 한글신문을 창간하는 일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일이었으며, 누구도 이 길이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동료들과 밤을 지새우며 원고를 작성했고, 인쇄할 활자를 하나하나 준비했다. 그에게 신문은 단순한 종이 위의 글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희망을 불어넣을 불씨였다.


마침내, 1898년 4월 9일. 서울의 거리에 첫 번째 '매일신문'이 등장했다. 백성들은 호기심에 신문을 집어 들었고, 그들이 처음 접하는 신문은 단지 글자들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들, 나라의 현실, 세계의 변화, 그리고 그들의 권리를 전달하는 새로운 창이 되었다.


이승만은 매일신문을 통해 단순히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신문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이 스스로를 개혁해야만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나라로 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이 교육과 산업,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일신문의 창간은 단순히 신문 하나가 발행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역사를 바꿀 첫 번째 물결이었다. 최초로 한글 100% 신문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찾아주었고, 그들의 마음속에 자주독립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조선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첫걸음이었다. 이승만은 그 길을 열었고, 그 길은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이끌어가는 힘이 되었다. 그의 손에서 태어난 한 장의 신문은, 결국 한 민족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물결을 일으켰다.



23세의 대중 연설가: 혁명가의 탄생

1898년, 한양의 하늘은 새로움과 변화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새로운 나라에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위협과 일본의 야욕이 뒤섞인 불안한 공기가 맴돌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자주독립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승만이라는 젊은 지식인은 그 열망의 중심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라는 혁신적인 단체의 일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독립협회는 민중을 깨우고, 그들의 힘을 모아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자 했다. 당시 23세였던 이승만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그의 눈에는 조선의 어두운 미래가 아닌 밝은 희망이 보였다. 그는 독립협회의 주요 활동 중 하나인 "만민공동회"에 깊이 관여했다.


만민공동회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마치 지금의 광화문 광장과 같은 역할을 했던 이 모임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모여 나라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정부에 개혁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 모임에는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이는 당시 철저히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승만의 연설: 민중의 울림이 되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는 대대적인 만민공동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 해 가을, 서울 종로에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를 맞아,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종로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승만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민중 앞에 섰다.


이승만은 비장한 어조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강대국의 손에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황제 폐하의 권력도, 국민의 뜻과 지혜를 모아 제한해야 합니다. 의회를 설립하여, 민중의 목소리가 정치의 중심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의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서구의 민주주의 원리와 의회의 기능을 설명하며, 민중이 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는 점을 조목조목 설득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민중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고, 사람들은 이에 열렬히 호응했다.


이승만과 독립협회의 이러한 활동은 곧바로 정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한제국 정부와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가 자신들의 권위를 침해하고, 왕권을 약화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이승만이 주장한 황제권의 제한과 의회 설립 요구는 그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는 조선의 오랜 정치체제와 전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정부는 독립협회를 위험한 반정부 세력으로 간주하고, 탄압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정부는 독립협회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도 반정부 활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는 한성감옥으로 끌려갔다.


한성감옥에서의 결심: 독립을 향한 굳은 의지

한성감옥의 차가운 벽 안에서도 이승만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조차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굳게 다졌다. 그는 감옥 안에서 자서전 《독립정신》을 집필하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철학을 기록했다. 이 책은 이후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은 감옥이라는 억압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켰다. 그의 정신은 갇히지 않았고, 오히려 더 큰 비전을 품게 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번영을 꿈꾸며, 언젠가 그 꿈을 실현할 날을 위해 묵묵히 준비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초기 생애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개인적 각성의 시기였다. 그는 청년 시절 성리학을 공부했으나, 점차 서양 문물과 기독교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이승만이 전통적인 가치관을 넘어 새로운 세계관을 수용할 수 있게 했으며, 이는 후일 그가 자유민주주의와 서구식 입헌정치를 주창하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상반되는 개념의 철학과 사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던 지식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흔하지 않은데 이런 이승만의 도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성향은 자유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되었다.


1904년,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러일전쟁이 한반도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일본 제국은 조선을 자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선은 고립된 채, 외세의 침략 앞에 무력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시기, 한성감옥에 갇혀 있던 이승만은 단순히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품게 되었다. 조선이 다시 태어나려면, 자주적이고 강력한 국가로 재건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감옥에서 태어난 새로운 비전

감옥의 어두운 벽돌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희미했지만, 그 빛은 이승만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빛나는 비전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조선의 미래를 깊이 고민했다. 무기력하게 외세에 휘둘리던 나라의 모습은 그에게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이자 분노였다. 그는 단순한 독립, 즉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조선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나라가 외세의 압박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그 후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약한 나라, 무능한 정부, 그리고 혼란스러운 사회가 있을 뿐이었다.


이승만은 생각했다. "우리는 단지 해방을 넘어서야 한다. 조선은 독립된 후에도 강력한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시 다른 강대국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그의 비전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조선은 자주적이고 강력한 국가가 되어야만, 진정한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다.


1904년, 감옥 밖에서는 러일전쟁이 한창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군사 기지로 삼아 러시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승만은 감옥 안에서 전쟁 소식을 전해 들으며, 더욱 강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조선이 외세의 게임판에서 말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했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무기력했고, 나라의 운명은 일본과 러시아라는 두 거대한 제국의 손에 좌우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감옥에서 그는 결단을 내렸다. "조선이 다시 태어나려면, 우리는 자주적이고 강력한 국가로 변모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그는 감옥이라는 고립된 장소에서, 새로운 조선의 비전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국으로의 망명: 새로운 조선의 설계

1904년 말, 이승만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감옥의 벽을 넘어 이미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미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미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 지지를 이끌어내고, 동시에 조선을 자주적이고 강력한 국가로 재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서구의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연구하며, 이를 조선의 미래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승만에게 독립은 단지 정치적 해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을 새로운 시대로 이끄는 첫걸음이었다.


이승만의 비전은 훗날 대한민국의 번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나라의 근본을 새로이 설계한 개척자였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단순히 외세로부터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약한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강한 국가였다. 그 비전은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도 그의 신념은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곳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그의 정치 철학이 실제로 구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1919년, 이승만은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통해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국제 사회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1919년, 세계의 중심이라 불리는 뉴욕에서, 한반도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 대륙의 도시에서, 이승만은 거대한 역사의 물결을 일으키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조국 조선은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철권 아래 신음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의 마음속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단지 연설문과 글뿐이었지만, 그가 꿈꾸는 미래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도착한 이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조용히 서류 작업을 하는 대신, 미국의 정치적 심장부인 워싱턴 D.C.로 발걸음을 옮겼다. 1919년 3월, 그는 미 국무부와 백악관, 그리고 주요 언론사들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며 외교전을 시작했다. 이승만에게 이것은 마치 전쟁과도 같았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국제사회가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품고, 전 세계에 조선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의 고위 인사들과 외교관들을 끊임없이 만나 설득했고, 그들의 이해와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끝없이 자료를 제출하고 설명했다. 그는 조선이 단순히 억압받는 식민지가 아니라, 자주적인 민족으로서의 권리를 가진 국가임을 강조했다. 그의 노력은 단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조선의 계집을 불쌍히 여긴 조선의 왕족

1904년의 어느 날, 하와이의 따뜻한 바람 속에서 한 조선 남자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서구 문명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 그 지식을 자신의 조국을 위해 활용하고자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조국의 현실, 특히 조선 여성들의 처지가 떠오르며 한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조선의 계집들이 불쌍하다.” 이승만은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가끔 이렇게 말을 꺼냈다. 당시 조선 여성들은 교육 기회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가정에서 종속적인 역할만을 강요받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 상황을 깊이 안타까워하며,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음먹었다.


하와이의 한 학교에서 이승만은 몇몇 조선 여자아이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이 아이들은 대부분 조선에서 부모를 잃거나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었다. 이승만은 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서구식 교육을 접하게 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자 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낯선 환경과 언어에 두려워했지만, 이승만의 따뜻한 가르침 아래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다. 그는 단순히 영어와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이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너희들도 남자아이들과 똑같이 꿈을 가질 수 있다. 교육은 그 꿈을 실현하는 첫걸음이다.” 이승만은 이렇게 말하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하와이에서의 교육 경험은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 이후 1948년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여성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파리강화회의: 세계 무대에 조선의 이름을 올리다

1919년,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새로운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열었다. 이승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하는 큰 계획을 세웠다. 당시 조선은 국제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된 상황이었지만, 이승만은 조선을 세계 지도자들의 눈앞에 가져다 놓으려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협력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한 강력한 성명을 작성했다. 이 성명서에는 일본의 식민통치의 잔혹함과 조선의 자주적 민족으로서의 권리가 명확히 서술되었고, 이를 통해 국제 사회에 조선의 독립을 정당화하려는 이승만의 전략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 성명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으며, 또한 미국 언론을 통해 이 내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활동은 조선이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잊혀진 나라가 아니며, 독립을 향한 강력한 열망을 가진 민족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Korea's Appeal to the Nations》

이승만의 또 다른 중요한 활동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인사회를 조직화하여, 독립운동의 자금과 인적 자원을 확보했다. 이승만은 이를 통해 미국 내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특히 1920년, 이승만은 《Korea's Appeal to the Nations》라는 책자를 출간했다. 이 책자는 조선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이 책자를 통해 미국과 유럽의 지도자들, 언론,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조선의 독립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책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국제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활동들은 미국 내에서 조선의 독립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국제사회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한 손에는 펜, 다른 손에는 조선의 미래

이승만이 미국에서 주도한 독립운동은 단순히 외교적인 노력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에 펜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조선의 미래를 설계하며 세계를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싸움을 벌였다. 그의 활동은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지만, 그가 이끈 외교적 전투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승만은 무너져 가는 조선의 현실 속에서, 단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만을 넘어서, 새로운 조선을 위한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이승만의 노력은 그가 꿈꾸던 독립된 조선, 그리고 강력한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한 사람의 목소리로 세계에 맞섰고, 그 목소리는 결국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이승만이 평소에 조선이 단순히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 만으로는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없으며, 자주적이고 강력한 국가로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던 정신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승만의 파격적인 여성 투표권 부여

이승만이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매우 선구적이었다. 당시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조차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고, 특히 한국은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정치 참여는 더욱 낯선 개념이었다.


이승만은 이런 상황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새로운 국가로서의 길을 걷는 데 있어 남녀 평등의 원칙을 중요한 기초로 삼았다. 이는 그가 단순히 서구의 민주주의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보다 진보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승만이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단순히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그가 가진 여성에 대한 깊은 존중과 평등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하와이에서의 경험은 그가 조선 여성들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여성관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선구적인 결단은 대한민국이 남녀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기초가 되었다.


이승만의 유산과 8.15 정신의 현대적 의미

이승만의 정치적 유산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조선말기 백성들과 대한민국 초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그는 조선의 마지막 왕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왕권을 부정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온전한 자유주의 사상을 대한민국의 기초로 삼았다. 또한,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보존할 수 있도록 강대국 건설이라는 목표를 끝까지 고수하며 대한민국의 현대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승만이 주장했던 자유주의, 평등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8.15 정신에 깊이 깃들어 있다. 8.15 정신은 단순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이승만이 강조했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 건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G2의 국가로 성장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조회수 117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