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0월 1일에 한국과 미국 사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며 1954년 11월 18일에 조약 34호로 발효되어 금년이 70주년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끝물과 관련되어 있고 휴전된 직후이기에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시기였다. 이 조약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내에서의 리더십을 30여 년간 체험한 자로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맺어진 역사적인 사건으로, 한미동맹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숨겨진 이유가 있다.
첫째. 한국전쟁에서 천하제일의 미 해병대의 희생과 한국 해병대의 반격이 있었다.
한미동맹의 밑바탕에는 미국인들의 피로 세워진 제단이 있다. 미 해병대 제1사단 병력은 6.25 전쟁에 참전해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대규모 공세를 맞아 장진호 전투에서 큰 희생을 치렀다. 혹한의 겨울, 엄청난 폭설과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미 해병대 1사단 병력은 중공군의 파상공격에 맞서 장진호 전투 도솔산 지역에서 스미스 사령관의 지휘하에 싸웠지만, 혹한의 한계에 부딛쳐서 해병대 전투병력 미군 6,000여 병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었고, 부상도 4,582명으로 보고되었다.
이때 한국 해병대가 나섰다. 김대식 부대장은 도솔산 전투에서 매일같이 17개의 고지를 점령하며 미 해병대의 한을 풀어주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들에게 "무적해병"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한국 해병대의 활약은 한미동맹의 체결에 깊이 각인되었고, 미국인들에게 '피의 제단'으로 대한민국의 의미를 새기게 했다. 이 전투가 없었다면, 한국은 군사적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과 외교적 수완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인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은 무려 178회 이상 전선을 방문해 연설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웠고, 각 부대마다 한자성어를 남겨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미국의 군 지휘관들과 관료들을 만날 때마다 명확한 메시지와 정신 무장을 강조하며,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은 단순히 조약 체결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쟁 중에도 미국 선교사들과 빌리그레함 등 민간 외교를 통해 미국 내에서 한국의 입지를 다지고, 최고 지도력을 발휘하며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 결과, 세계 최강의 군대를 한반도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며 세계 군사 강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대한민국을 오늘날까지 지키고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셋째. 미 공화당의 지도력과 한미동맹 강화의 초석이 있었다.
한미동맹의 형성에는 미국 공화당의 적극적인 지원도 큰 몫을 했다. 북한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남침으로 파상적 공격 앞에 한국전쟁 초기에 대한민국의 생존 위기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조언과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극복되었고, 이후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의 5000:1의 성공 확률에서 적극 결행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설득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 두 지도자는 공화당 정신의 소유자들로서 모든 과정에서 공화당의 지지와 지도력이 뒷받침되었고, 이를 통해 한미동맹은 7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전을 거듭해 왔다.
한미동맹은 단순히 군사적 협력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이 동맹을 통해 세계를 섬기고, 자유와 평화와 인권을 지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북한 동포들에게 자유와 인권,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한미동맹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앞으로도 세계적 리더십을 확산해 나가는 그랜드 통일 한국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김회창 박사 (한미동맹강화 재단 총재, 한미맥아더장군기념사업회 미주총회장, 미공화당필승한인팀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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