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월 15일 대통령 권한으로 사면 됐다. '국정농단'으로 실형을 살다 가석방된 지 1년 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시절 이재용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적폐 세력으로 간주, 직접 수사해 감옥에 넣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 이재용은 자신을 잡아 넣은 검사가 대통령이 돼 자신에게 특별 사면을 주게 될 줄 알았을까?
검사일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대통령이 되자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역대 대통령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취임 전후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특히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그랬다. 대기업 총수의 활동 무대가 국제적인 반면 정치권은 헤비급들도 국내용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보이지 않던 경제 관련 국제 문제들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윤 대통령 취임 후 100일이 지났다. 윤 정부는 취임 후 여론 챙기기보다 실무에 올인(All in) 했다. 이런 윤 정부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미 지난 정부의 업적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반도체 산업의 육성이 한국에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라는 것에 윤 정부가 강하게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윤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은 후 반도체 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한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삼성은 지난 5월 세계 3위 반도체 장비회사인 미국 램리서치 윤석민 수석디렉터를 설비기술연구소 설비개발실 담당임원(부사장)으로 영입했다. 또 6월에는 퀄컴 출신 윤세승 부사장을 파운드리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 담당임원으로 영입했다. 20년간 250조원을 투자해 미국에 반도체 공장 11개를 신설할 계획도 세웠다.
같은 달, 이재용 부회장은 유럽 출장에서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의 차세대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도입까지 결정짓고 왔다. 이렇게 이재용 부회장은 경영권에 제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삼성의 기술 초격차 전략을 위해 반도체 관련 업무를 직접 챙기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런 그가 사면 후 첫 행보로 기흥 R&D센터 착공식에 참석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법적으로 자유로워진 이 부회장의 본격적인 공식 활동으로 기술 경영에 힘을 싣겠다는 의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삼성은 최근 세계 최초로 3나노 파운드리 양산까지 성공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대만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TSMC는 이미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삼성을 압도적으로 추월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기업과 공동 연구 및 기술 이전을 통해 시스템 반도체 이외의 분야에서도 삼성을 추월할 계획까지 수립하고 있다. 정치적 리스크도 언제 다시 삼성의 발목을 잡을지 알 수 없다. 이재용 부회장이 검찰 조사와 언론의 플래시 세례로 고통 받고 있을때 TSMC는 유유히 해외의 기술과 자본을 흡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