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얌전한’ 보수우파 며느리들이 가한 일격
애국가보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더 좋은 공격자들…….
1980년대 중반 필자가 친구와 함께 서울 신촌의 한 동시상영관에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일이다.
당시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극장에서 애국가를 화면과 함께 틀어 주었다. 오랜만에 그 ‘전체주의’적 의례를 강요당하는 5공 치하의 극장에 왔던 탓인지 그 순간이 무척 불쾌하고 모멸스러웠다. 친구가 옆에 있어서 더욱 ‘의식 있는’ 20대 청년으로서 객기를 부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는지도 모른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던 중간쯤에 필자가 고함을 빽 지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다른 순간도 아니고 국가(國歌)가 상영되고 있는 동안에 그런 몰상식하고도 무례한 잡음을 내다니……. 그것은 반독재 ‘의식’과는 거리가 먼, 친구 앞에서 뭔가 보여 주려고 한 치기에 불과한 도발이었다.
야당의 대선 예비후보 최재형 집안에서 새해 가족이 모일 때마다 애국가 4절을 다 부르는 국민의례를 한다고 해서 조롱과 반박이 일어나는, 대한민국 대선 사상 초유의 ‘며느리 성명서’ 발표를 보자니 옛날의 그 일이 떠올라 씁쓸함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린다.
3공에서 시작돼 5공 이후까지 18년간 지속한 ‘국기하강식’도 전체주의적 애국 강요 행사이긴 했다. 오후 5시(여름철엔 6시)에 갑자기 애국가가 나오면 거리에서 길을 걷던 시민들이 일제히 부동자세가 돼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아나운서의 녹음, ‘우리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라는, ‘굳게’를 특히 힘주어서 길게 발음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뭉클해지는 가슴으로 경청했다.
한국의 진보좌파를 포함한 많은 국민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미국 학교에서도 국기에 대해 맹세를 한다. Pledge of Allegiance (충성의 맹세)라는 것을 어린 초등학생들도 다 외워 매일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암송하도록 하고 있다.
“I pledge allegiance to the Flag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o the Republic for which it stands, one nation, indivisible,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나는 미합중국 국기와 그것이 상징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결코 나누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이를 위한 자유와 정의의 나라입니다.)”
애국은 이렇게 교육하고 세뇌하는 과정을 통해 실천되는 것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동네를 지나다 보면 집에 국기를 걸어 놓은 풍경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들의 애국심은 정말 놀랍다. 이 투철한 나라 사랑의 마음이 어떻게 교육을 거치지 않고 사람들 가슴에 새겨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올림픽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놀라운 투혼을 발휘해 메달권에 들어 시상대에 올라갔을 때 그들 가슴에 달린 태극기를 보고 무한한 자긍심을 갖는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가 자랑스럽게 가슴에 손을 얹고 있을 때 감격의 눈물을 쏟기도 한다.
다른 데서도 이래야 한다. 모든 국민의 애국적 행위, 모든 태극기, 모든 애국가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어찌해서 진영이 다르면 그 애국심을 존경하는 대신 조롱을 보내는가?
최재형의 부친 고(故) 최영섭 대령은 6.26 대한해협해전의 영웅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애국 군인이 나라를 걱정하며 나라를 위해 애국가를 모두 부르자고 가족들에게 제안해서 실천한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를 존경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들이 파시즘이네 전체주의 냄새가 나네 하며 비난한 건 아마도 최 대령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나라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걱정을 많이 해서 애국가를 부르자고 했다고 소개한 기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라 걱정보다 문재인 비판이 괘씸했던, 좋게 말해서 진영 논리, 더 직접적으로 치부를 들추자면 가볍고 속 좁은 모습이다.
자기편 수장을 건드리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대깨문들이 느닷없는 며느리 걱정을 하며 시아버지 최 대령과 그 가족들의 명예 훼손을 자행한 대 대한 이 집 며느리들의 반격, ‘며느리 성명서’는 그 분연(奮然)한 궐기와 명문장이 ‘애국 국민’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한 것이었다.
“...저희는 나라가 잘된다면 애국가를 천번 만번이라도 부를 겁니다... 저희는 애국가를 부르는 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괴롭지도 않습니다. 저희 며느리들은 돌아가신 아버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기억할 겁니다. 부디 저희 아버님 명예를 더 이상 훼손하지 말아 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필자는 ‘며느리’가 쓴 글 중에 이렇게 힘차고, 교양 있고, 애국적인 문장을 본 적이 없다. 나라가 거덜 나도 강남좌파의 진보 겉멋, 내로남불 위선에 취해 살면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 애국 우파들 조롱과 비난에만 골몰하는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한방이었다.
최영섭 대령의 네 며느리, 즉 최재형의 아내와 형수, 제수들은 하나같이 국내 유수의 대학을 나온, 이른바 양갓집 규수 출신들이다. 규수(閨秀)란 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여자라는 말이기도 하고 우아하고 얌전한 처녀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 우아함과 얌전함은 곧 보수가 그렇게 비치려고 노력하는 상징이다. 그들은 ‘우아하고 얌전한’ 보수우파 여성들을 대표해 비신사적이고 야비한 진보좌파들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호(國號)보다 ‘우리나라’, 애국가보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더 선호하는 며느리 공격자들에게, 후렴구를 제외한 아름다운 대한민국 애국가 2절, 3절, 4절을 들려주겠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기사출처:‘며느리 성명서’의 통쾌함…그리고 그 씁쓸함 (dailian.co.kr)
여론 조작 더 판칠 내년 대선
작금의 석연치 않은 후보, 대통령, 정당 지지도 급변 의심스러워
SNS 장난으로 문재인에 이어차기 정통성 문제도 심각해질 것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데일리안 류영주 기자
김경수의 유죄 확정은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공포에 가까운 걱정이다.
하나는, 그럼 문재인은 뭐냐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의 수행비서였던 전 경남지사 김경수가 이동원 대법관에 의해 2017년 대선 무렵 드루킹 댓글 조작 공모 혐의로 징역 2년형이 최종 선고됐으니 그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부하(직책은 부하이나 사실은 최측근)의 범죄(선거 지원) 행위를 몰랐어도 책임이 있고, 알았다면 더 큰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상대 후보였던 안철수나 홍준표 측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은 대통령의 정통성에 중대한 하자가 발생했다면서 최소한 사과는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야 대신 사과를 요구하는 사정은 짐작이 어렵지 않다.
첫째,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은 댓글 조작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박근혜 탄핵, 소위 촛불 혁명으로 여론이 급경사를 이뤄 당시 야당(민주당)에서 누가 나오든 절대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둘째, 이 시점에서 ‘드루킹’ 사건 전모를 파헤쳐 문재인 선까지 공모자를 밝혀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번 김경수 재판도 그 개인의 공모에 한한 것이어서 그런 정의와 상식에 부합하는 판결이 나올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셋째, 문재인의 임기가 사실상 반년 조금 더 남았다. 임기와 관계없이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하야해야 할 일이 드러난다면 해야겠지만, 일반 국민은 이미 ‘다 끝난 일’로 여기고 있다.
이제 김경수 유죄 확정이 안겨준 두 번째 문제를 적을 차례다. SNS 시대에서의 선거란 조작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며, 이 조작과의 싸움이 유권자와 정당, 후보들의 최대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더 고도화하고 지능적으로 된다고 볼 때, 윤석열과 최재형, 이재명과 이낙연 등의 후보들 최대 적수는 상대 후보가 아니고 조작이라는 범죄다.
대선이 7개월 남짓 앞으로 다가온 지금 어느 무명 출판사 빈방에 본부를 차려 놓고, 수십 명이 밤낮으로 짜장면 시켜 먹으면서 휴대폰과 컴퓨터 앞에 앉아 가짜 댓글들을 다는 등의 작업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모여서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닉슨의 워터게이트는 저리 가란다.
3~4년 전 ‘드루킹’은 모여서 했다. 9000만개 가까운 댓글을 특수 프로그램 가동으로 자동 게시하고 공감 버튼도 눌렀다. 당시 경찰은 그들이 이 작업을 위해 휴대폰 170여대를 사용하며 연간 11억원을 쓴 것으로 (드루킹의 예상 밖 폭로에 따라) 안 밝혀도 될 사실을 얼떨결에 수사, 여권 관계자들을 난감하게 했다.
당시 민주당 대표로서, 보수 정당의 조작으로 나쁜 댓글들이 갑자기 많이 달리고 있다고 본 추미애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 이 엄청난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드루킹이 댓글 조작의 대가로 김경수에게 요구한 오사카 총영사 직이 무산되자 태도를 바꿔 여권에 불리하도록 역(逆) 댓글 작업을 한 것이었는데, 추미애가 이를 모르고 지뢰밭을 밟은 것이다.
이 재미있는 논공행상(論功行賞) 거래 흑막은 다음 정권에서 아마도 조사가 이뤄져 국민들의 궁금증이 풀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김경수를 포함한 얼마나 많은 문재인 주변 실력자들과 전 대통령 신분이 돼 있을 문재인 본인까지 검찰에(검수완박 ‘개혁’이 미수에 그칠 경우 검찰이 공수처를 묵살하고 수사 주도권을 잡는다면) 불려가는 모습이 TV 화면에 비치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차기 정권의 ‘적폐 청산’ 드라마에 대한 기대보다는 당장 그 차기 정권이 창출되는 데 크나큰 걸림돌이 될 것이 확실한 여론 조작 가능성이 정권교체 열망 국민들을 매우 걱정스럽게 한다. 작금에 발표되는, 이유가 석연치 않은 여론조사 결과 추이가 매우 의심스럽지 않은가?
하루아침에 한두 후보의 지지도가 급락하고, 일부 후보들의 인기는 급등하면서 특정 후보 간 양자 대결 예상도 일관성을 많이 벗어난다. 대통령 업무 수행 평가가 갑자기 좋아져 지지율이 10% 치솟는다. 코로나 방역으로 보거나, 부동산 대란으로 보거나, 청년들 취업난으로 보거나,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문재인의 인기가 그만큼 반등할 이유를 필자는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또 정당 지지도도 그렇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순위가 날마다 왜 엎치락뒤치락 인가? 조사 과정과 방식의 차이 아니면 장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아침에 생각 다르고 저녁에 의견이 다른, 갈대들임이 틀림없다.
야권의 유력 대권 주자 캠프의 한 인사는 이런 여론조사는 조작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한 여론조사의 경우 민주당 경선 국면에서 민주당 지지자가 전화 응답에 많이 참여하는 시점을 이용해 국민의힘 지지자는 30%, 민주당 지지자는 60%가 반영되는 불균형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정당 외에 지역 표본 설정 ‘조작’으로도 결과가 10~15% 포인트 달라졌다는 그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골방에 모여 앉아 여론 조작을 해서 승리하거나, 그것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탄생할 다음 정부는 시작부터 정통성 논란이나 선거 부정 의혹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드루킹과 김경수에 의한 문재인 정통성 의문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본격적인 이슈가 될 공산이 크다. SNS 시대에는 조작도 쉽지만 그걸 알아차리는 것 역시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2022년 새 정권의 ‘적폐 청산’ 작업 1호는 여론 조작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