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0년 (철종11) 윤익상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76년 19세 때 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한 외당 유홍석의 장남인 강원도 춘천사람 유제원과 결혼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에 비분강개해 시아버지가 의병으로 출정하자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을 창작 보급하면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진력하였고,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데도 적극 앞장섰다.
윤희순은 처음부터 의병대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시아버지가 아기도 키워야 하고 집안 살림도 꾸려야 하고, 또 제사도 지내야한다고 말린다.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던 시절
이라 처음에는 윤희순도 그 말에 수긍을 한다. 하지만 나라가 점점 위태로워져 또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윤희순도 직접 참가를 한다. 나라사랑에 남녀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면서 여자들을 모아 '안사람 의병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군 조직을 만든다. 안사람 의병대원들은 군사 훈련도 받았지만, 주로 쇠붙이를 모아 화승총을 만들고 오줌을 모아
화약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의병 활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시아버지 유홍석은 그 자리에서 자결하려하자 윤희순은 지금 죽으면 일본만 좋은 일이지 뺏긴 나라를 어찌 찾으려 하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은 중국 만주 땅으로 건너간다. 윤희순도 곧 가산을 정리하고 뒤따라가려고 할 때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친다. 의병장이던 시아버지의 행방을 말하지 않으면 어린 아들을 죽이겠다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패면서 협박한다. 그러나 윤희순은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이라고 아들을 살리겠다고 아버지를 팔 수 없다 소리치자 그 서슬 퍼런 당당함에 일본 헌병들은 물러갔다.
중국 만주 땅에서도 윤희순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윤희순의 아들, 며느리, 조카까지 가족 모두가 독립 무장 투쟁에 앞장섰기 때문에 '가족 군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윤희순은 아직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당시 중국인들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을 함께 했던 중국인들 중에는 윤희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윤희순 개인의 삶은 고단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하였을 뿐 아니라, 늘 일본의 감시와 핍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 시아버지 유홍석이 세상을 떠나고 이어 남편 유제원도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아들 유돈상마저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본에게 붙잡혀 고문 끝에 숨을 거둔다. 그때 윤희순의 나이 76세였다
이국 만리 이내 신세 슬프도다 슬프도다 어느때나 고향 가서 옛말하고 살아볼꼬 방울방울 눈물이랴 맺히나니 한이로다
-윤희순의 신세타령 중
의병 활동에서 독립 전쟁까지 40여 년 한평생 항일 독립 투쟁 외길을 걸어오던 윤희순은 붓을 들어 [해주윤씨 일생록]이라는 글을 남긴다.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혹독한 고문으로 숨진 아들의 시신을 본 지 열하루 만에 윤희순도 아들의 뒤를 따라간다. 광복을 10년 앞둔 1935년 8월이었다.
[해주윤씨 일생록]을 보면 "매사를 시대에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하는 말이 있다. 옳은 도리, 지금 우리 시대의 옳은 도리란 무엇일까요?
믿음을 가질 때 역사만큼 큰 울림이 있는 것은 없는것 같습니다. 문득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 매우 궁금했어요 책은 한달전에 미리 사놓았는데 이제서야 올립니다. 책에 인물들 매일 올려볼게요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