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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CIA 요원 마이클 리 박사 "대한민국은 건국부터 날조의 역사. 젊은이들아, 목숨 걸고 바로잡아라"


전직 CIA 요원 마이클 리 박사와 백서스정책연구소 김정현 대표가 마이클 리 박사의 서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전직 CIA 요원 마이클 리 박사와 백서스정책연구소 김정현 대표가 마이클 리 박사의 서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년 10월 20일, 92세의 마이클 리(Michael P. Yi) 박사가 미소 지으며 맞이했다. "어서 오게, 먼 길 왔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하고, 집 안은 책장으로 빼곡하다. CIA 24년, DIA 16년 근무하며 북한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본 이 남자의 서재에는 한반도 지도와 오래된 문서 더미가 쌓여 있다. 10월 20일, 이곳에서 진행된 2시간 인터뷰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었다. 이 박사는 "워싱턴의 안경으로 본 한국 현대사"를 쏟아내며, 김일성의 '가짜 신화'부터 북한군의 공작으로 발생한 5·18 사태, 김대중의 '반역'까지 폭탄 발언을 연발했다. "대한민국 국정원은 김대중때 적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젊은 세대가 나서야 해!" 그의 절규는, 한반도 위기 속에서 청년들의 가슴에 울림을 준다.


마이클 리 박사는 대한민국 육군 복무 후 25세에 DIA 502 군사정보단 수석심문관으로 발탁된 이후 400여 명의 북한 귀순자·간첩을 심문했다. CIA 입사 후 주한미대사관 정무관, 한미 협력 조정관으로 활동하며 동아시아 안보 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은퇴 후 알래스카에서 교수로 지내다 세종연구소 영문 편집국장으로 복귀한 그는, 매릴랜드 집을 '마지막 요새'로 삼고 있다. 인터뷰 중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40년간 북한을 봤소. 그놈들은 거짓말의 달인들. 우리 역사도 그놈들에 의해 날조된 거요." 그의 주장은 단순한 개인 증언이 아니다.


마이클 리 박사 발언은 통상적으로 좌편향 된 한국 교과서나 메이저 언론에서는 접할 수 없는 내용이다. 특히 5.18 광주사태와 관련해서는 5.18 특별법에 의해 다른 견해를 주장하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미국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는 미국 정보기관 관료 출신인 마이클 리 박사 외에 국내에서 5.18 관련 진실을 온전히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이클 리 박사는 역사 문서, 기밀 해제 자료, 법원 판결 등 구체적 사료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했다. 이 박사는 "각 주요 사건의 역사적 배경을 더 깊이 파고들어 설명하겠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 김일성은 가짜! 진짜 영웅 김일성은 시베리아에서 굶어 죽었다"

백마탄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진 김경천(김광서)
백마탄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진 김경천(김광서)

독립운동가 김경천의 잊힌 항일투쟁과 그 비극적 결말인터뷰 초반, 리 박사는 '김경천 장군'의 이름을 읊조리며 운을 뗐다. "이 사람이 진짜 김일성이오. 본명 김광서, 1888년생. 일본 육사 23기 중위로 졸업한 뒤 3·1운동에 충격받아 만주로 망명했지. 지청천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키우고, 시베리아 가서 볼셰비키와 타협해 무기 사들여 일본군과 6년 싸웠소." 그의 눈이 번뜩였다. "김일성은 그의 가명 중 하나. 그런데 1937년 스탈린이 조선인 18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쫓아냈지. 김경천은 공산당 가입 거부로 '수용소 군도'에 갇혀 1942년 영양실조로 죽었소.


증손녀 김올가가 카자흐스탄에서 업적 밝히려 애쓰는데, 한국 정부가 외면하고 있소. 왜? 만주 '동북항일연군'에서 중국 공산당이 이름을 도용한 가짜 김성주(북한 김일성)를 살리려 하니까!" 이 주장은 리 박사의 CIA 시절 북한 정보 분석 경험에 기반하지만, 구체적 사료로 뒷받침된다. 먼저, 김경천의 항일투쟁 기록은 1983년 (사)한국독립유공자협회 자료에 명확히 적혀 있다. 이 자료는 김경천(본명 김광서, 18881942)을 "항일투쟁의 영웅,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규정하며, 1919년 만주 여녕성 고산군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 시베리아 극동 지역 조선인 18만 명 근거지에서 무기 구입, 1919-1925년 6년간 일본군 무장투쟁을 상세히 기술한다.


김경천의 항일투쟁 배경을 더 풀어보자. 마이클 리 박사의 설명처럼 1910년 일제의 한일병합으로 조선은 식민지화됐고, 1919년 3·1운동은 전국적 항일 물결을 일으켰다. 이 시기 김경천은 일본 육사에서 배운 군사 지식을 조국 독립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19년 봄, 가족을 만나러 한국에 온 그는 3·1운동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곧바로 만주로 망명해 지청천(일본 육사 26기 후배)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됐다. 이 학교는 이시영 선생이 설립한 독립군 양성 기관으로, 총기 한 자루 없는 소수 독립군이 70만 일본군에 맞서 싸워야 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김경천은 시베리아 극동 지역으로 가 조선인 18만 명 사회를 동원해 볼셰비키(소련 붉은군대)와 협상, 무기를 구입했다.


1920년대 초반, 그는 러시아 홍군과 연합해 백군(반볼셰비키 세력)과 전투를 벌이며 연해주 무장항일투쟁을 지휘했다. '조선의 나폴레옹'으로 불릴 만큼 기마 공격에 능한 그는 1920년대 초반 항일무장투쟁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일기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은 2005년 발견돼, 1920년대 연해주 항일빨치산 사령관으로서의 생애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이 투쟁은 단순한 게릴라전이 아니었다. 김경천은 일본군의 만주 진출을 저지하며, 독립군의 생존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모색했다. 그러나 1925년경 투쟁이 궤멸되자 그는 소련으로 피신했다.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와 사망 기록은 러시아·카자흐스탄 문서에서 확인된다.


스탈린의 '극동 조선인 강제이주'는 소련의 반일 정책과 내부 안보 우려로 18만 명의 조선인을 중앙아시아로 쫓아낸 비인간적 정책이었다. 김경천은 공산당 가입을 거부해 일본 스파이로 몰려 시베리아 형무소(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배경지)에 수감됐고, 1942년 1월 2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리 박사는 "중국 공산당이 유명한 김경천 이름을 도용해 가짜를 띄웠다. 첫 번째 김일성(1903년생)은 전투 중 사망, 두 번째(제2방면군)는 병사. 세 번째가 김성주"라고 반박했다. 1945년 모란봉 환영회 '가짜' 논란은 한설야 소설가의 증언으로 유명하다. 리 박사는 "국민들이 57세 김경천을 기다리다 33세 청년 보고 모두가 '가짜' 라고 생각했소.


한설야가 폭로해 숙청당했지"라고 회상했다. 전 CIA 요원 마이클 리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대 북한 문학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불렸던 한설야(韓雪野)는 체제의 예술가이자 김일성 혁명서사의 설계자였다. 그는 해방 직후 월북해 조선문학가동맹과 문예총을 이끌며 ‘혁명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김일성 개인의 전쟁·항일 신화를 미화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신화를 가장 잘 이해했던 인물은 바로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가장 깊이 알고 있던 사람 또한 한설야였다. 한설야는 김일성 우상화의 원형 서사를 직접 집필했던 인물이지만, 동시에 그 신화가 어떻게 날조되고 편집되었는지를 내부에서 목격했고 이것을 발설해 비밀리에 숙청됐다.


마이클 리 박사는 미 중앙정보국 동북아 담당 시절, 북한 문화선전 기관의 내부 문서를 분석하면서 한설야가 1960년대 후반 이후 김일성 신격화의 과장과 허구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을 안다고 밝혔다. 북한 정권은 겉으로 한설야를 ‘공로 있는 혁명문학가’로 예우했지만, 1969년 이후 그의 이름은 문예총 명단에서 사라졌다. 평양 문학계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이후 당의 ‘문학사 재편사업’ 과정에서 조용히 격리되었고 공식 발표 없이 1976년 사망 처리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한설야는 북한 문학의 기틀을 세웠지만, 자신이 만든 거짓 신화를 깨닫고 그 허구를 드러내려 했던 순간 사라졌다. 그의 이름은 아직도 북한 공식 문학사에서 ‘혁명문학의 개척자’로 남아 있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김일성 신화의 유령 작가이자, 마지막 증인”으로 기억한다.


"김구는 배신자, 이승만은 인류의 영웅… 효창동 동상은 치워라!"

1948년 건국 반대와 기밀 문서,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벌어진 정치적 갈등. 인터뷰가 뜨거워지자 리 박사는 지긋이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김구? 애국자 행세의 민족 반역자요. 1948년 안두희가 건국 협조 요청하니 재떨이 던지며 '김일성 주도 공산 통일 기다린다'고 소리쳤소. 최근 기밀 문서를 통해 공개되었어요. 김구가 '북한 훌륭하다'며 이승만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지." 그는 인조반정 김자점(김구 조상)의 청 내통을 비유했다. "배신 피가 흐르는 놈이야. 효창공원 기념관·동상? 치워야 해. 이승만 박사는 40년 미국 독립투쟁 끝에 카이로 선언(1943) 숨은 공로로 해방 이끌었소.


김구, 유어만의 비망록 1948. 06. 11
김구, 유어만의 비망록 1948. 06. 11

국민 75%가 사회주의 선호할 때 자유민주주의 세운 인류 문명사 위업이요!" 마이클 리 박사가 김구의 대한민국 건국 반대 행적을 증언한 인물은 실존했던 미국의 정보장교와 장개석 정부의 외교관이다. 먼저, Erle Cocke Jr. (얼리 코크 주니어)는 미 육군 정보장교(G-2)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모두 참전한 베테랑이다.


1947~1948년 미군정청(USAMGIK) 고문으로 서울에 파견됐으며, 유엔 한국문제 실무자문단(UNTCOK) 자문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UNTCOK과 미군정 간 연락조정 역할을 맡아, 유엔 대표단이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군사·행정 지원을 제공했다.


얼리 코크의 역할은 해방 후 미군정의 반공 정책과 유엔의 한국 독립 감독을 연결하는 핵심이었다. 그의 증언은 리 박사의 CIA 시절 자료에서 인용되며,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 공산 세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Cocke는 이후 미 국방성, CIA, UN 군사사절단, 미국재향군인회 총재 등 역임하며, 한반도 안보 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또 다른 인물은 장개석의 외교관으로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미국 외교문서집) 1948년 ‘The Korean Question’ 섹션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유어만(劉馭萬, 류위완)이다.


FRUS Volume VI (The Far East, 1948)에서 유어만은 UNTCOK의 서울 현지 활동 보고서에서 "김구의 반건국 움직임"을 언급하며, 김구의 만남을 기록했다. 이 문서는 김구가 "북한 노동당·군대의 우수성"을 이유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고 증언한다. 마이클 리 박사의 주장과 일치한다. 유어만의 보고서는 미군정의 내부 문서로, 1948년 5월 UNTCOK 총선거 감독 과정에서 김구의 좌우합작론이 소련의 공산화 야욕과 맞물렸음을 드러낸다.


코크와 유어만은 해방 초기 미군정의 '안보 네트워크' 일부로, 김구의 행적을 직접 관찰한 목격자였다.이들의 증언은 김구의 '배신' 주장하며 그를 암살한 1948~1949년 서북청년단 안두희 사건의 중요한 사료다. 서북청년단 간부 안두희는 1948년 8월 15일 건국 직후, 김구를 방문해 "이승만 주도 건국 참여"를 요청했으나, 김구가 "죽었다 깨도 안 한다. 김일성 원수의 공산 통일 국가를 기다린다"고 반발하며 재떨이를 던졌다. 안두희는 1996년 회고록에서 김구의 반건국 활동과 배후를 언급하며, "김구가 김일성의 꼭두각시"라고 주장한 재건위원회 기록을 소개했다. 1945년 해방 후 한반도는 미소 공동관리(미군정·소련군정)로 분단됐고, 1948년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좌우 갈등이 극에 달했다.


마이클 리 박사는 이어 "카이로 선언의 숨은 공로자도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했다. 카이로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미·영·중 3국 정상회의(루스벨트·처칠·장제스)에서 채택됐다. 이 회의는 일본 패망 이후 아시아 질서 재편을 논의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당시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은 1919년부터 한인 교민사회와 상하이 임시정부를 연결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외교 로비를 통해 미국 정가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


홉킨스는 이승만의 오랜 지인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이 미국의 태평양 전략에 유리하다”고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그 결과 1943년 12월 1일 발표된 카이로 선언문에는“세 나라(미·영·중)는 한국 인민이 노예 상태에 있음을 유의하며,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됐다.이승만은 다음 날인 12월 2일 루스벨트에게 감사 서한을 보냈다. 학계는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조항’이 장제스의 제안이거나 루스벨트의 탈식민 구상에서 비롯됐다고 본다.그러나 마이클 리 박사는 이승만의 외교적 로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민주화로 위장된 김대중의 프롤레타리아 공산혁명’

마이클 리 박사
마이클 리 박사

마이클 리 박사는, 1998년 이후 한국 정보기관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 안기부의 대공요원 581명이 해고됐습니다. 경찰 대공 2500명, 기무사 600명까지 포함하면 3600명 이상이었습니다." 명분은 조직 쇄신이었지만 실상은 정보체계의 해체였다.


그는 당시를 냉정히 회고했다. “김대중 이후로 국정원은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이 아닙니다. 북한의 ‘대남공작연락사무소’처럼 변했습니다." 본래의 정보 수집과 안보 임무가 아니라, 적국의 기관이 됐어요" 대한민국 최고 정보기관이 북한과의 접촉 창구로 전락했다는 뜻이었다.


“한국의 민주화는 거짓 위에 쓰여졌습니다.” 마이클 리 박사는 담담히 말했다. 그는 아시아 지역 공산권 분석을 담당했던 전 CIA 요원으로, 냉전기의 한반도 역사가 날조 됐다고 주장했다.


리 박사는 1985년의 이른바 10억 원 사건을 언급하며 김대중의 대남공작 행위를 설명했다. “그해 봄, 김대중은 당시 신민당 총재였습니다. 그는 서울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이철과 접촉했습니다.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국제 정세가 유리하다. 10억 원을 줄테니 프롤레타리아 해방 투쟁에 협력하라.’ 10억 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이었다.


리 박사는 이 사건을 민주화로 둔갑한 김대중 대남적화 공작의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했다.“그건 단순한 정치자금이 아니었습니다. 냉전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념 자금이었습니다. 마이클 리 박사의 주장은 월간조선에 실린 이철의 자필 고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의 배후에 존재한 이념적 구조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40년간 근무하며 북한을 감시했던 마이클 리 박사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북한의 공작으로 규정하며 충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는 한국이 이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국가가 됐다고 지적하며, 젊은 세대가 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 박사는 특히 1981년 광주 민주화운동(이하 5·18)을 북한의 600명 특수군과 김대중 지지세력이 결합한 국가전복 시도로 규정했다. 그는 "2020년 5월 12일, 국가기밀 해제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가 발표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5·18은 북한의 대남 공작단과 김대중 추종자들이 합동으로 대한민국을 정복하려 한 반란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라고 밝혔다. 이 문서는 5·18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한 결정적 증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리 박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 시기의 4·19 혁명에도 북한의 개입을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공작 지휘관 '이석'이 4·19 혁명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며, 3·15 부정선거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았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대통령과 무관합니다. 조병욱 후보가 사망해 단독 후보로 당선이 결정된 상황이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양심에 따라 스스로 하야를 선택했습니다. 이승만은 위대한 대통령입니다"고 설명했다.1970년대 전태일 분신 사건 역시 북한의 '분신 타살'로 규정했다. 리 박사는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을 괴롭히기 위한 북한의 공작이" 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한국 역사상 북한의 개입이 없었던 사건이 없을 정도로, 북한 공작이 크고 작은 모든 사건에 관여했다고 단언했다.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발생한 미군 장갑차 압사 사건(신효순·신미선 양 사망)도 예외가 아니다. 리 박사는 "이 사건은 반미 감정을 유발하기 위한 북한의 공작"이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학생인 효순·미선 양이 접근 불가능한 미군 훈련장에 들어간 점, 첫 번째 탱크가 아닌 두 번째 탱크에 치인 점 등을 고려하면 탱크 운전수의 과실치사가 아니라 누군가 훈련 중이던 탱크 사이로 그녀들을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촉발된 반미 시위와 사회적 혼란도 북한의 의도된 결과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CIA에서 북한 전문 요원으로 활동한 리 박사는 한국의 현재를 진단하며 "대한민국은 이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만 버틸 수 있는 국가가 됐다"고 경고했다. 그는 "젊은 세대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면 안 된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의 주장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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