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cle | Forum Posts
top of page

게시판 게시물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2월 23일
In 종교/복지정책게시판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외면하십니까? 주님이 필요한데 어디 계십니까? 악인들이 큰소리치며 가난한 이들을 맹렬히 뒤쫓고 있으니 하나님, 저들의 다리를 걸어 자기들이 꾸민 흉계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들은 빈말을 떠벌리고 3-4 사기꾼 입에서는 구린내가 진동합니다. 저들, 하늘을 찌를 듯 콧대가 높아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벽마다 휘갈겨 쓴 낙서가 보입니다. "잡을 테면 잡아 보라지!" "하나님은 죽었어." 저들은 주님의 생각에 전혀 개의치 않고 5-6 방해가 된다 싶으면 바로 주님을 외면합니다. "우리는 잘못되지 않아. 올해는 운이 좋거든!" 하면서 자기들이 근사하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의 입에는 저주가 가득하고 7-8 저들의 혀는 살모사처럼 독을 내뱉습니다. 선량한 사람들 뒤에 숨어 있다가 만만한 이들을 덮칩니다. 운 나쁜 이를 눈여겨 두었다가 9 사냥꾼처럼 은밀한 곳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다 그 가련한 사람이 가까이서 헤매기라도 하면 뒤에서 그의 등을 찌릅니다. 불행한 이는 걷어채어 땅바닥에 쓰러지고 10-11 운 나쁜 그는 잔인하게 난도질당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곤경에는 관심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나님, 일어나실 때입니다. 서두르소서. 12-13 가련한 이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도 어찌하여 무사한지, 저리도 기고만장한데 어찌하여 문책을 당하지 않는지 그들의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아십니다. 14 그들이 당하는 업신여김과 학대를 잘 아십니다. 언젠가는 가련한 저들이, 주님 주시는 복을 분명히 받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저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실 테니, 그들이 영원한 고아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악인들의 오른팔을 꺽으시고 15-16 악질들의 왼팔을 부러뜨리소서. 범죄의 낌새까지 모두 찾아 없애 주소서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와 명령이 승리하고 사악한 자들은 패할 것입니다. 주께서 가련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니 17-18 저들의 희미한 맥박이 약동하고 절망에 빠진 이들의 심장이 붉은 피를 뿜어 올립니다. 고아들이 부모를 얻고 노숙자들이 집을 얻습니다. 공포정치가 끝나고 폭군들의 지배도 막을 내립니다. 한국이 다시 사는 길은 부르심을 회복할 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진동을 허락하셨는지 깊이 기도해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너무 우울한 소식들이 많은데 다윗의 시편은 대부분 사울에게 쫓기며 죽음의 위협을 당할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응답하심을 경험할 때일 것입니다. 모두 힘내서 저를 포함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진피터슨의 Message 셩경 시편을 올려봅니다. 조금 더 현대에 맞게 풀어서 쓴 성경이라 이해하기 쉽습니다.
MESSAGE 구약 시가서 (유진피터슨)

시편 10편
 content media
5
0
18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26일
In 종교/복지정책게시판
하와는 순결하였지만 인간 본능으로 인하여 뱀의 교묘한 거짓말에 흔들린다. 하와는 뱀이 누구건 간에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뱀에게 저항하기는커녕 뱀의 꾐에 굴복한다. 하와는 즉시 순결성을 잃게 된다. 그 다음 하와는 결정적인 세 단계를 밟는다. 우리는 항상 이 단계에 따라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1) 하와는 더럽혀진 망상에 굴복했다. 하와의 마음은 금단의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에 매혹되었다. 곧 이 금단의 열매는 하와의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되었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는 "사탄의 약속은 하와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몰아내었다. 이제 하와가 그 금단의 나무를 보는 눈은 전과 다르다 (창 3:6). 하와는 금단의 열매가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세 번이나 말했다"고 적고 있다. 칼빈은 하와가 뱀의 유혹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믿음이 타락한 것이라고 본다. 하와에게 '금단의 나무는 먹음직하게' 보였다 (창 3:6a). 먹는 것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먹는 것을 금하신 금단의 나무였던 것이다. 하와는 감정적 즐거움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 금단의 나무가 '보암직도' 했던 것이다(창 3:6b). 그리고 또한 하와는 창조될 때 이미 육체적으로 성숙하였을 것이며 예수님처럼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2)의 구절처럼 되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이루어진 모든 창조는 알려지고 밝혀졌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담과 하와가 모든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아담과 하와의 지혜가 자라도록 하셨다. 그렇다면 왜 단 한 그루의 금단의 나무와 그 열매에서 나오는 금단의 '지혜' 를 갈망하게 됐을까?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2) 하와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았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창 3:6d) 하와는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하와는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여 왔던 모든 것에 등을 돌렸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기로 했다.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먹었으나 그 즉시 눈에 뛸 만한 나쁜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죄라는 것이 다 그런 식이 아닌가? 처음에는 매우 즐겁고 우리에게 어떤 기대를 품게 하는 죄는 진실한 것처럼 보인다. 죄가 일시적인 쾌락을 주는 것은 사실이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전한다 (히 11:25). 죄라는 것이 쾌락을 주지 않는다면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겠는가? 3) 하와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담을 죄로 끌어들였다.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e). 이것은 사회적인 차원의 죄다. 죄는 죄를 범하는 사람을 해칠 뿐만 아니라 죄를 범한 자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친다. 죄는 동반자를 원한다. 다른 많은 사람 중에서 특별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삶에 죄의 씨앗을 뿌린다. 이것이 죄의 방법이다! 아담이 하와의 죄에 가담한 것에 대한 많은 저서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아담은 뱀이 유혹하는 장면에서 시종일관 벙어리처럼 옆에 서서 지켜보기만 하고 듣기만할 뿐 혼란에 빠진 자기 아내 하와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아담은 아내의 설득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또 다른 사람은, 아담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아내의 유혹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2:14는 이런 견해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바울은 "아담이 꾐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꾐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말했다. 도널드 거스리 (Donald Guthrie)는 이 말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것 같다. "하와는 꾐에 빠져 속았으나 아담은 두 눈을 뜬 채 죄를 범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무엇인가?" 칼빈은 이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하는데, 이 답 중에는 "자만심은 모든 죄의 시작이며, 이 자만으로 인해서 인류가 타락했다" 는 어거스틴의 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사탄의 똑같은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모든 선한 것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헐벗음과 가난을 깨닫게 하며 아담 안에서 잃었던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만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면 예수께서 갖고 계신 것으로 우리를 풍요롭게 채우실 것이다. 아담에게서 비롯된 인간의 타락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맨 처음 결과는 남자와 여자의 영적인 죽음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고 말았다. 그들은 생명 나무로 접근하는 길을 차단당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3). 아담의 타락이 빚은 가장 큰 결과는 전인류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 성서는 이와 같은 끔찍한 결과에 대하여 다른 어떤 책보다도 강조하고 있다. 에베소서 2:1--5에서 사도 바울은 매우 간절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로 생명을 얻기 전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세상 풍속을 좇아' 살고 있다. 그들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권세에 따라서,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의 권세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 육체의 욕망' 가운데 살고 있다. 그들은 '육체의 욕망과 마음의 욕정에 탐닉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 다. 이것은 '다른 이들과 같이'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하는 조건이다.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믿을 수 없이 어두운 것이다! 아무도 이 설명을 피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인류를 이 기준에 포함시키고 있다.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자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모두 마귀의 자녀들이다 (마 13:37--39 : 요 8:44: 요일 3:3--10 상). 2) 그들은 사탄의 왕국에서 살고 있다 (골 1: 12--14). 3) 그들은 사탄의 굴레에 씌워 있다 (행 26: 18). 4) 사탄이 그들을 눈멀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안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후 4:3--4: 눈이 멀게 되는 인간적인 이유들은 고후 3:14--15을 참조) 5) 그들은 모두 악한 자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 요일 5:19). "악한 자의 손아귀에 붙잡혀 그의 지배를 받고 있다 ⋯ 사탄의 팔 아래에서 자고 있다"고 존 스토트 (John R. W. stott)는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6) 그들은 모두 사탄의 소유이다 ( 마 12:22--29). 7) 그들은 모두 사탄이 조종하는 세계 체제 속에서 노예화되어 있다 (요 12:31; 14:30; 16:11; 요일 5:19) 8) 그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게 굴복한 상태에 있다. "그들의 삶은 악한 초자연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다" 고 한 주석가가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엡 2:2). 우리들은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배워야만 한다 (고후 2:11). 우리들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를 향한 사탄의 간계에 무지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은 기도와, 선포된 말씀, 그리고 굽히지 않는 신앙을 통해 인간 개인의 삶과 사회와 세계의 각 지역들을 다스리는 정사와 권세들과 싸울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엡 3:10; 6:12--18' 계 12:11). 귀신들이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악한 초자연적 세력들이 이미 패배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탄과 귀신들은 주님의 구원 행위로 하늘의 권세 있는 자리를 이미 빼앗겼다. 요즘 저의 변화는 성령께서 제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죄된 부분도 깨닫게 하시고 마귀를 대적하게도 하시고 기억도 잘 안나는 오래된 상처도 생각나게 하셔서 무의식중에 애써 부인하다가 오늘은 직면해 보았습니다. 제 안에 분노도 있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발견했습니다. 다시 그 때의 그 감정으로 돌아가 용서를 선포하며 회개도 했습니다. 참 힘들고 감정이 잘 추스러지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믿음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함께 해 주신 주님이 보였고 감사했습니다. 가끔씩 이런 적이 있는데 치유가 되고 나면 다시 그 당시를 떠올려도 아프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참 섬세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경험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영적전쟁 핸드북 Ⅵ

 content media
5
2
23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25일
In 종교/복지정책게시판
창세기 3장에서 얻은 영적 전쟁에 관한 교훈들 먼저 사탄과 나누는 상호 대화의 위험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여기서 말하는 대화는 말로 하든 마음 안에서 하든 마귀가 원하는대로 나누는 대화 말이다. 사탄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 라 하시더냐?" 하와는 사탄을 침묵하게 하는 대신 그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그러자 사탄은 하와의 대답에 교묘하게 반응하며 덪을 놓았다. (창 3:1--6). 마귀가 원하는 방법대로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마귀가 주는 모든 의심과 거짓과 자만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은 마태복음 4:10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라는 예수님의 말씀뿐이다.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씀은 에베소서 6:17에 있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rhema)" 과 같은 뜻이다. 귀신들은 일단 정체가 드러나면 완전히 침묵을 지키다가 돌연 말이 많아진다. 그때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반드시 귀신들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 악령의 입을 다물게 할 때 일인칭 '나'를 사용하면 안되고 대신 주님께 부탁하여 악령을 잠잠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 어디에도 주님께 부탁하여 악령을 잠잠하게 하는 절차를 가르쳐 주거나 그 절차를 따른 예가 없다. 앞서 말한 주장이 매우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마귀의 세계를 누를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또다시 요구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에게 주어지는 이 같은 권세는 주님의 열두 제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며 (눅 9:4) 다른 70인 제자들에게도 주셨다 (눅 10:1 이하). 70인 제자들도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사도단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 그리스도인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70인 제자들은 전도하고 돌아와서 자신들이 마귀를 누르는 권세를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70인 제자들은 기뻐하며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7) 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도와 전도 이외의 중요한 일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라고 주의를 주셨을 뿐이다. 귀신들의 항복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눅 10: 17--18).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 더 중요했다 (눅 10:20). 성경 가운데 복음서 이외에 축사를 기록한 곳은 사도행전 16장 뿐이다. 사도 바울은 70인 제자가 실시했던 축사 사역을 그대로 따라했다. 누가는 바울이 귀신들린 빌립보의 여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 여자에게서 썩 나가라"고 외치자 "마귀가 곧 떠났다"고 쓰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 창세기 3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사탄이 자기 방법으로 하와를 꼬여서 자신과 대화하도록 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탄은 교묘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공격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렇게 하시더나?" 랑게(John Peter Lange) 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사탄이 애매모호하게 하와를 미혹시킨 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라는 사탄의 질문은 의심쩍은 놀라움을 나타낸다. 이런 사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경우에 따라서 "예"도 되고 "아니오"도 될 수 있다. 이것은 유혹이 시작될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이다. 사탄은 매우 조심스럽게 의심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그 다음 사탄은 불신을 일깨우고 동시에 자제력을 약화시킨다. 사탄이 하와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동산에 있는 맛있는 열매를 전부 다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는데 하나님이 너에게 선하시냐" 하나님께서 정말 선한 분이시라면 어떻게 너에게 그럴 수 있니?" 우리도 마음속에서 그런 음성을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고통당하는 너를 그냥두시는 하나님이 정말 선한 하나님일까?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일까?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라면 어떻게 네가 사랑하는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암에 걸려 죽게 하실까? 어떻게 하나님을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품었던 여러 가지 의심들을 여기에 덧붙일 수 있다. 하와는 계속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하와가 처음부터 이 의심을 중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와는 이런 의심의 상념들이 더 이상 진행하지 않도록 중지할 수 있었고 또 중지해야 했지만 중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들이 마귀의 공격을 받을 때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기도 하다. 사탄은 자신의 사자인 귀신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사탄은 우리 믿음을 공격한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사람을 똑같이 대하지 않으신다고 지적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우리도 모르게 서서히 훼손한다. 우리들은 마음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사탄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사탄을 무찌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때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rhema : 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상의 특별한 구절이나 사실)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와는 하나님께 변호하려고 한다. 하와의 말을 쉽게 풀어 쓰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아니 너는 잘못 알고 있어. 우리들은 동산에 있는 열매를 다 먹을 수 있어. 다만 동산 가운데 있는 아무 열매는 빼고 말야." 사탄에게 대답을 하는 동안 하와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스쳐 갔을지 모른다. '왜 하나님은 금지된 저 나무를 심으셨을까? 왜 하필이며 동산 한가운데 저 금지된 나무를 심어서 우리가 매일 보지 않으면 안되게 하셨을까?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 하와는 사탄의 덫에 그대로 걸려들었다. 자신과 이야기 나눈 자가 사탄이었음을 하와가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와의 행동은 여전히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와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또 하와는 하나님께서 순종을 원하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와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할거야. 왜 하나님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셨든 나는 하나님을 믿을 거야. 나는 하나님께 순종할거야! 결코 하나님을 의심할 수는 없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 불행하게도 하와는 잘못된 생각을 따랐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하와의 믿음이 약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 마귀는 다음 단계를 취하였다. 마귀는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였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4).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이제 사탄은 더욱 과감하게 공세를 취하고 있다. 사탄은 자기 앞에 틈이 생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 벌어진 틈을 통해서 직접 공격을 감행한다. 우리들이 완전히 무장을 해제한 몸을 스스로 노출할 때 비로소 사탄은 공개적으로 전쟁을 벌인다. 사탄은 곧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거짓이라고 공공연하게 공격한다. 사탄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유혹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으로 경고하고 계신데, 우리들은 태평하게 졸며 하나님을 우롱하기조차 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생활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일단 마귀의 꾐을 당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여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마련이다. 우리 마음 안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 우리 마음이 공격받을 때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3--5에서 확실한 답변을 하고 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여기서 '육체' 는 아마도 우리의 인간적인 속성을 말할 것이다) 싸우고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고후 10"3). 어느 전쟁이든지 반드시 무기가 필요하다. 영적 전쟁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과 효과적으로 잘 싸울 수 있는 무기를 주셨다. "우리의 무기는 우리의 인간적인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들 중 제아무리 총명하고 강한 자라 할지라도 적을 이길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무기는 거룩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무기를 주셨기 때문에 그 무기는 우리의 대적이 가진 그 어떤 무기보다도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무기는 우리를 대적하는 마귀의 모든 요새를 파괴하는데 충분하다"고 바울은 주장한다 (고후 10:4). 그렇다면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바울은 5절에서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주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하와와 똑같은 상황에 있다. 마음(heart)과 감정(emotion)과 의지(will)가 포함된 우리 마음 (mind)은 우리 믿는 자들의 삶 가운데 있는 두 왕국의 싸움터이다. 이것이 일상 체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약 성경 전체의 증언이다. 만약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에서 이긴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영적전쟁 핸드북  Ⅲ content media
6
4
33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23일
In 종교/복지정책게시판
하늘과 땅에서 일어난 반역 죄가 전혀 없다던 나라에 어떻게 죄가 생길 수 있을까? 순결한 천사가 어떻게 죄를 범할 수 있었을까?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사탄과 천사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죄를 범할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만이 이 우주에서 (창조되지 않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 영원한 하나님이신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다. 하나님은 존재 하시지만 창조된 존재는 아니다. 하나님은 여기 계시지만 시작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항상 존재하셨고 존재하시며 존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절대적으로 완전하시다. 하나님은 온전한 마음을 소유하신다. 하나님은 모든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완전한 감정을 소유하신다.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은 항상 반드시 느껴져야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그 의지가 완전하시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옳은 것을 선택하신다. 사실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정의 되시기에 하나님은 악을 선택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죄를 선택하실 수도 없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들은 불완전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신이 아닌 존재만을 창조하실 수 있으므로 그 피조물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피조물은 창조주와 결코 동등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피조물을 창조하신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비슷한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피조물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그러한 정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피조물을 창조하시면서 그 피조물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할 수 있게 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들이기에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만 행동하도록 프로그램되지 않았다. 폴 쉴링(paul schilling)은 그의 저서 God and Human Anguish(하나님과 인간의 고민)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만 행동하도록 프로그램되었다면 다음과 같았으리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하며, 겉으로 행복하게 보이지만 스스로 결정을 내리거나 타인과 진정으로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인간은 본질적인 내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 마치 거대하고 엄격하게 짜여진 시스템 속에서 로봇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그들의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은 위대한 최면술사라 볼 수 있으며 이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최면 상태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는 존재일 뿐이다.···항상 선한 것을 선택하도록 창조된 인간(그리고 천사)이란 개념은 자기 모순적이다. 인간이 정말 자유롭다면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가 배제된 채 창조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실천을 통해 검증되지 않는 선택의 자유란 현실이 아니 단순한 이론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와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 중 하나를 선택하는 기로에 서야 한다. 선택의 자유는 루시퍼(이것이 사탄의 이름이라면)와 천사들에게도 주어졌다. 하늘 나라 천사들도 모두 복종에 대한 시험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런 시험에 관해 언급된 곳은 없지만 곳곳에서 그러한 암시가 있다. 타락한 천사 루시퍼의 꼬임에 빠지지 않았던 천사들은(사 14:12) 거룩하다고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 (막 8:38).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딤전 5:21, KJV)로 묘사되어 있다. 꼬임을 받았거나 반역자 루시퍼를 따른 천사들은 그들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죄악으로 낙인찍혔다. 성경에 의하면 그들은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이 사실은 귀신과 조우하면 확인이 가능하다. 귀신들은 불못에 던져질 운명을 인정하며 몹시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증오하며, 절대로 회개하거나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실로 악의 낙인이 찍힌 자들이다. 하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은 사탄이나 마귀로 불리는 한 천사가 범한 반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경은 시종일관 그를 악과 유혹의 유일한 창시자라고 밝히고 있다(요 8:44; 눅4:1-13). 또 그 마귀는 언제나 초자연적인 악한 천사 군대의 대장으로 등장한다(마 25:41: 계 12:3-17). "하늘 별 가운데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진"(계 12:4) 꼬리의 주인이 바로 이 마귀다(이 별들은 아마도 천사를 상징할 것이다) 그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명령하는 자다(엡 6:12). 하나님은 천사들도 자유의지를 주신듯합니다. 자발적 복종을 원하신 때문인지, 스스로 높아진 루시퍼가 천사들을 꾀어 같이 반역을 하게 된 것도 그들이 어느정도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요즘 진정한 능력자는 속이거나 뭔가를 제한하거나 억압하거나 통제하거나 이런 것들이 없어도 마음껏 해봐! 라고 자유를 주고 스스로 책임을 지게 하고 수습이 가능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면에서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그를 따르는 선한의지를 가진 이들도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될 수 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한 능력자는 아니지만 말이죠
영적전쟁 핸드북 II

 content media
4
0
9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22일
In 종교/복지정책게시판
영적 전쟁의 시각에서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측면은 아마도 영적 전쟁의 기원과 관련있다. 그 전쟁은 지상에서 있었던 인간의 타락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 점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의 기원은 먼 옛날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어느 시기와 우주의 어느 곳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구약 성경은 자주 악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는 우주적인 반란이 있음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초자연적인 악한 존재들이 인간을 해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구약 성경 어디에도 하와를 유혹한 뱀을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부른 곳이 없기 때문에 창세기 3장으로부터 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좀 무리인 것 같다. 그렇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분명히 그 뱀을 악마 또는 사탄과 동일시한다(고후 11:3; 계 12:9)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늦어도 신구약 중간기에는 유대교 교사들이 유대인 대중들에게 창세기 3장을 읽어 주고 설명하면서 뱀을 사탄과 동일시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인간 타락에 대한 신약 성경의 해석은 유대교와 일치한다. 비록 구약 성경에는 신약 성경처럼 사탄에 관한 언급이 많지는 않지만, 몇 군데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역대상에서 한 번, 욥기 1장과 2장에서 열 네번, 시편 109:6에서 한 번, 스가랴 3:1-2에서 세 번 언급되었다. 사탄의 활동 유형 사탄이 그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역대상 21:1에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했던 사탄의 의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시종일관 나타나는 사탄의 한 모습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활동은 전 역사에 걸쳐 나타나며 신자나 비신자 할 것 없이 매일 어느 곳에서나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사탄의 주요 전략, 대상, 목적을 알 수 있다. 사탄의 주요 전략: 거짓 먼저 사탄의 주요 전략인 거짓(deception)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구약 성경 저자는 사탄이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대상 21:1)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와처럼 다윗도 자기의 마음에 갑자기 나타난 그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윗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분명했으나(대상 21:8) 그는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다윗이 하고자 했던 일은 옳지 않았다. 심지어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은 어느 기준에서 보더라도 성인이 아니었지만, 그도 다윗의 결정을 옳지 못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반대의 진언을 올렸다.(대상 21:2-4) 이 일이 옳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려 하자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즉시 잘못을 회개하였다(대상 21:8). "내가 큰 죄를 범했나이다.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하였다. * 다윗의 인구조사의 잘못된 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시행한 모세 시대의 인구조사 (민 1, 2장)과 달리 다윗은 자신의 자만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 조사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소유한 군대에 더 의지했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자신이 거둔 승리에 대한 공적을 스스로 취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에 진노하시고 사탄에게 그 죄를 절정으로 몰고 가도록 허용하셨다. 결국 다윗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염병으로 백성 7만이 죽게됩니다 (맥아더 성경 주석 참조) 우리는 여기서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사실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죄에는 항상 이중적인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 측의 원인은 인간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다. 그러나 그것은 초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것, 즉 사탄의 유혹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사탄은 사악한 생각과 상상이라는 씨앗을 인간의 마음에 심고 그것을 자극한다 (행 5:1-3 ; 고전 7:5, 고후 11:3 ; 살전 3:5 ; 고후 10:3-5; 빌 4:8). 성경은 속임에 관해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속임' 이라는 낱말은 구약과 신약에 150회 이상 나온다. 바인은 속임은 본질적으로 '그릇된 인상'을 주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간에게 접근하는 방법이며, 이 방법으로 사탄은 맨 처음 그의 동료 천사들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유도했다. 사탄은 거의 매번 속임수로 유혹하기 시작한다. 바울은 이 점을 고린도후서 11:3에서 경고하며, 고린도후서 2:11에서는 사탄의 계략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사탄이 일단 인간의 삶 속에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면 (엡 4:27) 속임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때부터 사탄은 종종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놓고 자기에게 희생된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괴롭힌다. 사탄의 목표 : 지도자 두 번째 사탄이 속이는 주요 대상은 지도자다. 사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을 현혹시킨다. 정치, 군사, 경제, 종교, 교육, 언론, 가족, 기타 여러 분야의 지도층은 사탄이 속이는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온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만약 홀로 있는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사람만 영향을 받지만 가족이 있는 사람이 죄를 범하면 가족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어떤 단체의 장이 죄를 범하면 그 단체가 영향을 받고 어떤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조직의 책임자가 죄를 범하면 그 사회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국가 지도자가 죄를 범하면 그 국가가 영향을 받고 세계 지도자가 죄를 범하면 전세계가 영향을 받는다. 아돌프 히틀러를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만약 기독교 지도자가 죄를 범하면 교회, 기독교 기관, 또는 기독교인 가정이 파괴되거나 마비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깍아 내리려른 매체들에 의해 이용당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죄 된 행동들에 의해 피해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사탄의 목적 :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 세 번째로 사탄의 속임수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수치를 안겨 주고 심지어 심판까지 받게 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지도자로 택하신 다윗을 유혹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욕되게 했다. 그 결과 사탄은 간접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의로운 심판을 내리시도록 조장했다( 대상 21:7). 여기서 사탄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사탄의 사악한 계획의 주요 특징이 밝혀져 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부추긴다. 사탄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의 백성을 해치기 위해 존재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합니다. 지금 처한 어려운 현실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며 왜 일어나야만 했는지 알아야 분명치 않은 대상에 대한 분노를 멈출수가 있습니다. 또 적절한 전략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거대악이지만 그들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결코 크지 않습니다. QT를 할 때 늘 적용점에 포인트를 두는 편이지만 대상에 대한 이해도를 돕기 위해 계속 이론을 살펴보겠습니다!
영적전쟁 핸드북 I

 content media
5
4
30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19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신정숙은 1910년 5월 12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하던 신조준의 딸로 태어났다. 정숙은 아버지의 진짜 이름이 뭔지 몰랐다. 항일 독립운동을 하느라 워낙 이름을 자주 바꾼탓이다. 당연히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그립기도 했지만, 너무 서러웠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이 몹시도 중요하고 힘든 일이라는 건 알았고 그런 일을 하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스무살 때 할아버지의 중매로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장현근과 결혼을 했다. 남편도 개성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만큼 독립운동에 열심인 사람이었다. 그러다 남편이 애국청년단 간부로 활동하다 안창호 선생님과 감옥에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남편은 곧 감옥을 나오더니 또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 버렸다. 정숙은 남편을 찾아 무작정 중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천진에서 그만 중국 유격대에 붙잡혀 수용소에 갇히고 말았다. 그곳에서 김구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이 김구 선생님 밑에서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니까 김구 선생님을 만나면 남편을 만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주소도 몰랐지만 무조건 김구 선생님한테 전해 달라고 하면서 편지를 쓰고, 또 썼다. 누구의 딸이고 아내인데 제발 나 좀 수용소에서 빼달라고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기적처럼 그 편지는 김구 선생님 손에 들어가 중경에 계신 김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은 거기에 없었고 행방도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서러워서 펑펑 울었다. 그때 김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라 없는 백성이 느끼는 서러움만큼 큰 서러움이 없다." 옳으신 말씀이었다. 나만 서러운 게 아니었다. 우리 민족 모두가 서러운 시절이었다. 정숙은 김구 선생님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김구 선생님, 조완구 선생님, 이시형 선생님 등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을 가까이서 뵙고 그분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조국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조국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열렬했다. 한번은 김구 선생님이 내게 당시 일본 점령지였던 상해에 가서 어떤 중국인에게 편지를 전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기에 내 조국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기자 얼마나 기뻤는지·····. 김구 선생님이 내게 건네주신 편지는 종이 편지가 아니라 헝겊 조각에 뭔가를 표시를 한 거였다. 정숙은 그 헝겊을 등 뒤 겹옷 안에 꿰매어 가지고 상해로 갔다. 무슨 편지인지 그땐 알지 못했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그 일을 충실히 해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정숙은 광복군 여군, 군번 1번이 되었다. 만주에서 전투 공작대원으로 유격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일본군 점령 지역에 침투해서 우리 광복군의 창설을 알리는 전단을 뿌렸다. 그 전단을 보고, 강제 징집되었던 우리 젊은이들이 일본 군대를 탈출하여 중정에 있는 임시 정부로 참 많이 모였다. 또 일본 군대의 적정을 탐지하기도 하고 각종 교란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적지에 침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을 고비도 수차례나 겪었다. 우리 광복군은 우리 조국, 우리의 땅으로 진격할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우리 손으로 우리 땅을 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 계획 일은 1945년 9월이었다. 그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일본이 8월 15일에 먼저 항복을 해 버렸다. 해방된 조국은 슬펐다.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었고 김구 선생도 얼마 있지 않아 암살을 당하였다. 너무나도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슬퍼할 수 만은 없어서 조국을 위해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 주는 일이었다. 이후 서울 경교장에서 아들과 함께 머물던 그녀는 김구가 서거한 후 생계를 꾸리기 힘겨워 궁핍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1963년 독립유동자 연금제도가 생겼을 때, 연금 수령을 거부했다. 당시 독립유공자 선정을 국사편찬위워회의 특별심사위에서 했는데, 독립운동과 무관한 자들을 유공자로 둔갑시키는 그들의 역사왜곡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진정서를 제출한 덕분에 1977년이 되어서야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1997년 7월 8일 대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주 동안을 위대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만나봤네요 시위를 보며 가끔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림운동가들은 어떤 생애를 살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을까 궁금해서 서점을 뒤졌을 때 자그마치 300명의 여성독립운동가 사전을 발견했고 너무나 방대하여 주로 이야기 위주의 몇분만 올리게 되었어요 그렇게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살다간 분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고 뭐라 표현하기가 송구스럽습니다. 그리고 부와 명예를 누리지 않아도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야 할 명분이라는 것도, 매일 글을 올리며 느끼게 된 수확중 하나입니다. 또 기회가 되면 남성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보렵니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나무위키 참조]
광복군 여군 군번 1번  신정숙

 content media
6
2
22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18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본관은 현풍이며 1859년 2월 26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 김순영의 부인이며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이다.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 <사서삼경> 등을 읽히는 등 아들 김구의 교육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17세 때 남편이 반신불수가 되자, 안악 신천, 장연, 해주 등지로 의사를 찾아 안정을 되찾게 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봉기한 김구가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인천형무소 등지로 전전할때, 매일같이 면회가서 아들을 격려하였다. 김구가 탈옥하자 남편과 같이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 3개월간 투옥되었던 일도 있다. 곽낙원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한글 몇 자와 숫자만 겨우 읽을 정도로 많이 배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에서 존경 받은 큰 인물이었으며, 임시 정부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을 훌륭하게 키웠다. 곽낙원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곽낙원의 생일이 다가오자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들 너무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데도 여러 날이 걸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곽낙원은 자신의 생일상 차릴 돈을 직접 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고 했다. 생일날이 되자 곽낙원은 임시 정부 국무위원들과 청년들을 자신의 셋방으로 초대했다. 손님들이 다 모이자 곽낙원은 식탁 위에 보자기를 하나 꺼내 놓았다. 보자기 안에는 맛있는 음식은 없고, 권총 두 자루만 있었다. 그 돈으로 권총을 산 것이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생일은 무슨 놈의 생일인가? 그런 데 쓸 돈이 있으면 나라를 찾는 일에 쓰도록 하게. 이 총으로 왜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인다면 내 속이 편안하겠네." 하고 말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나석주 선생이 전당포에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빌린 돈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생일에 고기와 찬거리를 사 왔다. 그 일을 들은 곽낙원은 그날 밤 쉰 살이 넘은 김구 선생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고 한다. "사소한 일을 동지들에게 알려 생일을 차려 먹다니, 그러고도 어찌 독립을 하겠느냐?" 힘든 시절, 작은 일에서 마음이 풀어지면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곽낙원의 의지가 꿋꿋하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고, 또한 남편의 죽음으로 집안형편이 어렵게 되자 삯바느질과 남의 집 가정부 노릇을 하며 김구를 키웠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아들을 따라 옮겼다가 1926년 귀국하였다. 82세로 충칭에서 생을 마쳤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김구 (1876~1949) 인천 감옥소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을 살린 고종황제의 전화였다.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군인을 죽인 죄로 사형에 처해졌는데, 이를 안 고종황제가 전화를 걸어 사형을 중지시켰다. 전화가 개통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김구 선생은 이후 임시 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백범일지]를 썼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위대한 독립군의 어머니  곽낙원

 content media
5
0
11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17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본관 영양, 경상북도 영양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유복자를 길렀다. 1919년 3·1운동 때 중국 둥베이 지방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는 한편, 12곳에 교회를 건립하고 10개의 여성교육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힘썼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났다.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도 이 을미 의병에 참여했다. 남편뿐 아니라 아버지의 불매서원에서 공부하던 모든 유생들이 함께 의병 활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남편 김영주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그때 남자현의 나이는 24세,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남자현도 서울까지 올라와 함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평화 시위만으로는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는 만주 땅으로 건너가 독립 무장 투쟁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때 남자현의 나이 47세였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인해 만주 일대의 민심은 피폐해졌다. 항일의 의지는 높았으나 항일의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갈렸다. 1920년 8월 29일, 국권을 빼앗긴날을 기억하기 위해 1,000여 명의 독립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서로의 음성만 높아지고 마음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남자현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왼쪽 엄지손가락을 잘랐다. 그 피로 남자현은 글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방법이 옳은지, 더 나은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일본에 맞서 싸워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 같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힘을 모으자고, 한마음 한뜻으로 나아가자고 모두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1922년에 다시 우리 민족끼리 피를 흘리는 싸움마저 일어났다. 남자현은 그때 두 번째 손가락을 자른다. "독립운동계여! 단결합시다. 우리는 일본과 싸우러 왔지 동족과 싸우러 온게 아닙니다. 피 한 방울이라도 적을 위해 써야 하는 이때, 같은 민족을 해치는 데 쓰다니 너무 아깝지 않소?" 독립군들이 놀라 달려와 남자현의 손을 붙잡았다. "내 손가락을 아끼려고 하지 말고, 우리 동포를 아끼시고, 이 나라의 내일이나 아끼시오." 독립군들은 그제야 싸움을 멈추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남자현의 마음을, 그 의지를 잊지 않으려고 나무로 작은 손가락비를 세웠다. 오늘날의 UN인 국제 연맹이 만주에 현장조사단을 파견한다는 소식이 퍼진 때였다. 우리 독립군들은 국제 연명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릴 좋은 기회라 여겼다. 우리 조선 역시 만주국처럼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었다는 걸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했다. 일제는 모든 언론을 막고, 조사단이 머무르는 하얼빈의 호텔을 삼엄하게 통제하였다. 조사단에게 접촉하려는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다. 1932년 예순의 나이에 남자현은 자신의 세 번째 손가락을 자릅니다. 잘린 손가락에서 뚝뚝 흐르는 붉은 피로 다섯 자의 글을 씁니다. 대한독립원 '願立獨韓大' 대한은 독립을 원한다는 뜻이다. 남자현은 잘린 자신의 무명지와 붉은 혈서, 그리고 우리 여성의 독립운동 현황을 적은 보고서를 손수건에 싼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사단이 머무는 호텔로 드나드는 중국인 인력거꾼에세 부탁을 한다. 손수건을 꼭 전해달라고. 인력거 바닥에 손수건을 매단 채 호텔로 들어갔으나,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게 수색을 당해 손수건은 전해지지 못한다. 이 손수건이 국제 연맹에 전해졌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 1933년 만주 괴뢰정부 건국일(3월 1일)에 이규동등과 함께 일본장교 무토 노부요시를 살해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도 단식으로 항쟁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하얼빈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경신참변 (1920) 만주로 건너온 독립군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얻었다. 그러자 일본은 보복을 위해 만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남자들은 무자비하게 때려죽이고 여자와 노인, 아이들은 교회나 학교 안에 넣고 불을 질렀다. 이 일을 경신참변 혹은 간도 참변이라 한다.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새 절감합니다. 남자현은 19세에 결혼을 하고 24살에 과부가 되어 유복자를 기르며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의 대모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손가락 세개는 목숨보다도 값진 희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자유를 위해 현재는 우리가 그녀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는 간절함이 매일 드는 요즘입니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세 개의 손가락을 나라에 바치다  남자현

 content media
5
0
7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16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이광춘은 1914년 9월 8일 전라남도 나주군 다시면 복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정미소를 운동하는 부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활달하고 진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동교생들과 함께 소녀회를 조직하고 소녀회의 멤버로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던 1929년 10월 30일, 당시 광주여고보 3학년이던 이광춘은 친구 박기옥과 함께 통학 열차에 탑승하여 이동하다가 나주역에서 출입구를 나가려 했다. 그때 일본인 광주중학교의 4학년 학생 후쿠다 슈죠, 스메요시 가쓰오, 다나카 등이 접근해오더니 이광춘과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때 역에서 같이 걸어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이자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 박준채가 격분하여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후쿠다 슈조 학생이 "뭐냐 조센징 주제에"라며 무시했고, 격분한 박준채는 그의 따귀를 갈겼다. 이로 인해 나주역내에서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간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교육 당국이 한국인 학생들에게만 징계를 주는 등 부당한 처분을 하자, 이에 격분한 한국인 학생들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역으로 모여들어 정당한 요구를 했다. 억울하게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라, 학교 안으로 일본 경찰들이 들어오지 말라, 식민지 노예 교육을 시키지 말라, 학생회 자치권을 달라 등 학교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들은 학생들을 마구 잡아가기만 하였다. 이때 이광춘은 치마에 돌멩이를 싸들고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 광주고보 최쌍현 학생이 일본인 중학생이 휘두른 칼에 얼굴을 크게 다쳤다. 이 일을 계기로 광주고보,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등 광주의 모든 학생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일본은 서둘러 모든 학교에 일주일간 휴교령을 내렸다. 다시 학교로 등교하기 시작한 11월12일 광주 학생들의 2차 시위가 있었다. 많은 광주 학생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목포, 나주 지역의 학생들도 함께했다. 크게 당황한 일본은 학생 운동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보도 금지령을 내리고, 또 뒤로는 학생들을 살살 달래면서 사태를 수습하려 고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속지 않았고 광주의 신간회, 사회 단체, 청년 단체 등이 혼연 일체가 되어 학생 운동을 돕기 시작했다. 일본은 학교를 폐쇄하거나 일찍 겨울 방학을 실시하여 학생들을 통제하고 감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도리어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에 내려가거나 여행을 하면서 학생 운동에 관한 소식을 전해 전국적인 운동으로 이끌어 나갔다. 1930년 1월 8일, 학교는 다시 개학을 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1년 3학기제였다. 서둘러 방학을 하느라 기말고사를 치르지 못한 학교에서는 개학하자마자 기말고사를 치렀다. 이날, 잠시 일본 경찰의 손에서 풀려난 이광춘은 시험 시간에 교실 안 교탁 위로 올라가 외쳤다. "지금 우리 동무들이 감옥에 있는데, 너희들은 시험을 보겠다는 것이냐?" 이광춘이 밖으로 나가자 학생들이 모두 뒤따라 교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삽시간에 전교생들이 뭉쳐서 시험을 거부하며 밖으로 나갔다. 이 일로 인해 이광춘은 퇴학 처분을 받고 일제에 의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광주 학생을 본받자. 광주 학생을 따라가자." 전국적으로 '백지 시험 동맹'이 번져 나갔다.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은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확산되었는데,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후 5개월간 학생 운동은 더욱 확대되었고, 우리 민족의 해방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해방 이후,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이 일어났던 11월 3일을 기억하기 위해 이 날을 '학생의 날'로 제정하였다. 오늘날에는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그녀는 학교에 더이상 다니지 않고 평범한 주부로서 살아가면서 5남3녀를 낳았고, 1954년 전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2010년 4월 12일 나주시 남외동 남외2길 4번지에서 사망했다. 향년 96세. 그녀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나무위키 참조]
광주 학생 독립운동의 불을 당기다  이광춘
 content media
6
0
16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15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1909. 8. 12 본관 경주 원산출생, 고향인 두남리는 원산에서 10리쯤 떨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이곳은 일찍이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교회, 학교를 운영하는 등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조부와 부친도 사립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다. 루씨고등여학교를 나와 서울여자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YWCA 농촌사업부에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아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파견되어 농촌교육을 시작하였다. 구한말 최용신의 조부는 사재를 들여 고향에 학교를 세웠다. 그래서일까 용신은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협성 신학교에 다닐 때 황에스더 선생님이 농촌으로 가 선생님이 되어 보라고 하셨다. 우리 민족이 살길은 오로지 농촌에 있다고, 농민들이 깨어나야 우리 민족이 깨어난다고 용신은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예배당이 있는 안산 샘골마을에 선생님으로 갔다. 부푼 꿈을 안고 샘골로 왔지만, 막상 와 보니 농촌 마을의 실상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한 해 농사를 지으면 빗자루와 검불만 남기고 죄다 일제나 지주가 가져갔다. 농촌 가정에는 아무런 희망도, 꿈도 없었다. 용신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을 예배당으로 보내만 주면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콧방귀도 안 뀌었다. 이때껏 그깟 공부 안 해도 자식들 시집 장가 잘만 보내고, 잘살아 왔으니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여자애들은 공부시켜 놓으면 연애나 하다가 인생을 망치고, 남자애들은 도시로 도망가 버리니 절대 안된다고 하였다. 빨래터나 마을 사랑방에서는 얼기설기 곰보 처녀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쑥덕대기도 했다. 도시 학생들이 와서 농촌 계몽이다 뭐다 하면서 바람만 잔뜩 집어넣고 나중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냥 가 버려서 그게 너무 싫어서 반대했던 것이다. 용신은 이곳 샘골에 뼈를 묻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한두 명, 서너 명 예배당으로 오기 시작했는데, 점점 늘어나서 110여 명이나 되었다. 오전반, 오후반, 야간반으로 나누어도 좁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다음에 오라고 타일러도 아이들은 예배당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정말 배우고 싶어했다. 용신은 좁은 예배당이 아니라 학교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문제였다. 마을의 부잣집을 찾아가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면서 쫓아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멋진 학예회를 준비했다. 둥근 보름달이 뜨자 마을 어른들은 학예회를 보러 왔다. 춤추고 노래하고 학교를 세우게 도와달라는 멋진 연설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감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도시 애들만, 양반집 애들만 똘똘하고 말 잘하고 노래 잘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네도 교육을 받으니까 똑똑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학교 건축을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부잣집 어르신도 그제야 마음을 돌리고 용신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나르고, 흙을 날라서 뚝딱뚝딱 학교가 만들어졌다. 한 달 만에 기초 공사를 마치고 머릿돌을 세웠다. 다섯 달 만에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학교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이 일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학교가 만들어지자 일본 순사가 수시로 들락거렸다. 무얼 가르치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일본어만 써야 했는데, 용신은 원래 우리나라의 말은 조선어이고 한글이 진짜 국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일본 순사에게 들통 나면 감옥에 가는 건 물론이고, 학교 문도 닫아야 했다. 그래서 한 사람씩 밖에서 망을 보면서 수업을 했다. 일본 순사가 오면 냉큼 일본어로 된 책을 꺼내고, 진짜 우리 국어는 숨겼다. 그들은 똘똘 뭉쳐서 배움을 이어갔다. 용신은 아이들에게 더 많은 걸 가르쳐 주고 싶어서 좀 더 많을 걸 배우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다. 돌아오던 날, 고갯마루에서 아이들이 뛰어왔다. 용신이 일본에 간 동안 매일 고갯마루에서 '우리 선생이 언제 오시나?' 하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차마 그런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용신은 아이들 곁을 지켜 주지 못했다. 과로로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1964년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농촌을 지킨 상록수 최용신 content media
7
3
26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12일
In 음악문화산업육성정책게시판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순종의 눈물 온 세상 다시 빛나게 한 생명의 눈물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죽어야 살게 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영원한 신비 지으신 그대로 회복시킨 우리의 창조주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로 아버지 뜻 이루셨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이제 우리에게 맡겨진 그 소망 그 사랑 그 생명 아름답고 눈부신 십자가의 길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이유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죽어야 살게 되고 져야만 승리하는 놀랍고 영원한 신비 이 찬양은 작년에 백서스 방송을 보던 중 대표님께서 이땅에 살아야 할 존재이유가 예수로 인해 창조때 모습 그대로 회복이라고 하셔서 떠오른 찬양이라 한번쯤 클랜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 말씀이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또 제가 좋아하는 김양재 목사님이 우리는 이 땅에 행복하려고 태어난게 아니라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신 말씀도 기억납니다. 가장 고난의 정점에 있을 때 책을 통해 알려주시던 하나님의 섬세한 음성이라고 믿어집니다. 성령님은 늘 도와줄 준비가 되신 분이거든요 찬양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사명의 회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오신 이유  content media
6
0
21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11일
In 지적재산권산업정책게시판
우리가 비난에 대처하기 위해 외부 수단에만 의지한다면, 비난으로부터 받는 상처와 아픔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남들이 원하는 대로 내 모습을 바꾼다 한들 그들은 여전히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며, 오히려 나를 사랑했던 이들만이 달라진 내 모습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타인의 취향에 맞춰 내 모습을 바꾸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나에게 날아오는 비난들을 어설프게 주워 담기보다는 비난에 대응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근거 없는 비난과 인신공격에 대해서 적절히 맞받아치고 때로는 무시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오늘 결심한다고 해서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비난에 다치고 상한 마음이기에, 세운 계획들을 실행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마음의 힘을 키워야 한다. 스스로 '내가 틀리지 않았다', '나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에야 타인의 비난을 적절히 무시하고 맞받아칠 수 있는 자양분을 얻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비난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밝은 오늘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과 얘기해보면 대체로 이러한 공통점을 보인다. 1. 이제는 타인의 비난이 별로 신경 쓰이지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2. 그렇다고 나를 비난하는 타인의 태도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상황이 바뀌지도 않았다. 3. 이전과 달리 주눅 들거나 불안하지 않으니 자신 있게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다. 자기주장을 더 피력하게 되었다. 모두 상대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바꿔서, 똑같은 환경에도 적용할 수 있는 힘을 키운 결과다. 가장 중요한 열쇠는 자기 스스로의 힘이고, 우리는 이 힘을 자존감이라 부른다. 나는 너에게 평가절하 당하고 무시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자각, 자존을 위한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존재함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자존이다. 내가 존재함을 더욱 자주 느낄 수 있어야 나를 존중하는 길로 들어갈 기회도 더 넓어질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재난처럼, 비난은 언제든 나를 찾아올 수 있다. 우리가 나이 들었다고, 직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비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시간이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외부의 공격을 대비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할 진지를 틈틈이 구축해야 한다. 항상 남들과 싸우고 부딪칠수만은 없다. 상식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화하고 소통할 수 없는 상대들도 많이 있다. 따라서 칼을 갈기만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내가 깨부술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났을 때의 대비책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보다도 힘의 우위에 있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난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응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 사람이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사람과의 논쟁에서 승리했다"와 같은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젠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와 같은 대답이 가장 전형적인 호전의 신호다. 나도 충분히 잘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자존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자존의 과정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오늘은 다른 주제를 올려봤어요 환기를 좀 시켜보려고, 전에 읽었던 '상처받을 용기'란 책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끈임없이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비난에 대처하는 근육도 매일의 운동처럼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평안을 잃지 않고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스로가 옳다는 신념을 가질 때 누군가의 인정이 없어도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번 쯤 읽어보면 도움이 될 책 추천합니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상처받을 용기

 content media
6
2
35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10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며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박자혜는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궁궐로 들어갔다. 중인 출신인 부친이 딸을 궁궐로 보낸 것은 가정 경제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1900년대 당시 궁궐 밖에서는 여성들이 근대교육을 받으며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10년 간을 궁궐에서 보낸 자혜는 여전히 궁녀의 신분에 적합한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았다. 창경궁 돌담길을 따라 걷고 있을때였다. "캭캭캭캭 ~" 원숭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병원으로 가던 박자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며 높은 궁궐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앙상한 벚나무 가지 끝에 새 한 마리가 뽀르르 날아와 앉아 있었다. 아기나인으로 궁에 들어가 생활했던 십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저런 동물원도, 저런 벚나무도 없었지.' 곧 꽃망울을 터뜨리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창경궁 벚꽃을 보려고 몰려들까? 아니 저 이상하게 생긴 원숭이나 코끼리를 보려고 오는 건지도. 왜 하필 창경궁 안에 동물원을 만들었을까? 일본 천황의 궁궐에도 동물원이 있는 걸까? 자혜는 신기한 동물들을 구경하기 위해 궁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임금님이 살아계셨더라면 . 아니야, 차라리 이런 꼴을 보느니 고종황제께서는 어쩌면 돌아가시는게 나았을까? 정말 사람들이 쑥덕대는 것처럼 독살당하신 걸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신 태자마마는 어찌 되실까? 이젠 정말 조선이 일본이 된 걸까? 그래도 자혜는 운이 좋았다. 더 이상 궁녀가 아니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갈팡질팡하던 자혜에게 조하서 상궁마마는 새로운 길을 알려 주었다. "자혜야, 내가 널 숙명여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 줄 수 있단다. 어떠냐? 열심히 공부해 보겠니?" "네 마마님,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나라가 이 꼴이 되었지만, 곧 태자마마도 일본에서 돌아오실 것이다. 왕실이 다시 복원되면 그때에는 네가 큰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예.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서둘러 창경궁 맞은편 조선 총독부 소속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혜가 근무하는 산부인과로 들어서자 싸한 소독약 냄새가 풍겨 왔다. 자혜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조산부 양성소에 들어가 산파, 즉 간호사 일을 배웠다. 간호사는 여자가 경제적으로 독립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총독부 소속 병원에서 일한다는 게 묘하게 씁쓸했다. 특히나 일본인 의사과 간호사들에게 괄시를 받을 땐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곤 했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자주 독립을 외치는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파고다 공원뿐 아니라 전국에서 동시에 만세 시위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자 일본 경찰들은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주동자들은 경찰서로 끌고 갔다고 한다. "선생님, 여기 총상 환자에요. 급히 수술을 해야겠는데요." 자혜는 총상을 입은 환자를 발견하고 외쳤다. 설마, 시위대에게 총격까지? 그럴 리가?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다가 품 안에 든 종이를 발견했다.자혜는 얼른 그 종이를 품 속 깊이 감추었다.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슬프다! 오래전부터의 억울함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험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 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우리는 나아가 취하며 어느 강자를 꺾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독립 선언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자혜는 가슴이 요동쳤다. 박자혜는 3·1 운동 이후 간호사들과 조산원들의 모임인 '간우회'를 만든다. 간우회를 통해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독립 만세 운동을 했다. 또 조선인 의사들과 힘을 합해 진료를 하지 않으며 일제에 저항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은 박자혜로 하여금 독립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더 이상 일본인들을위한 병원에서는 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병원에서는 쉽사리 자혜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거짓말로 2주간의 휴가를 얻은 자혜는 곧장 중국으로 건너갔다. 북경에서 대학 공부를 하던 자혜는 신채호를 만나 결혼한다. 신채호역시 3·1 운동을 계기로 국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상해, 북경 등지에서 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 박자혜는 신채호와 각지를 다니면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도와준다. 그러던 중 신채호가 다렌 감옥에 갇히자 국내로 들어와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국내 인사들의 연락을 이어주는 일을 하였다 . 나석주 독립지사가 조선을 경제적으로 침략하고 있는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질때 도와준 사람도 바로 박자혜였다. 또한 박자혜는 남편 신채호가 감옥에서도 계속 역사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책들을 구입하여 보내 주었다.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 7년여 동안 옥중에서 집필한 신채호의 저서들은 박자혜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두꺼운 솜옷을 입고 싶다는 신채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을 때 박자혜는 이렇게 말했다. "다렌의 감옥은 얼마나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 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경제적인 이유로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솜옷하나 해 줄 수 없었던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운명을 달리하고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두범은 그 다음해 1942년 세상을 떠났다. 박자혜는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자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간호사 독립운동 단체 '간우회'를 세우다  박자혜
 content media
6
2
16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09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1900년 8월 3일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의 2남 4녀 중 셋째딸로 출생하여 김의한과 결혼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후 시아버지인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자 친정아버지에게 8백원을 얻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상해 임시 정부는 너무 가난했다. 무언가 큰일을 하려고 해도 자금이 너무 부족해서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다. 정화는 다시 국내로 가서 자금을 좀 얻어 처음에 친정이나 시댁에 가서 돈을 받아 올 생각이었으나 친정이나 시댁은 일제의 감시가 심할 테니 절대 가면 안된다고 하여 임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자금 조달 업무믈 맡아 달라고 하였다. 자금 조달 업무는 시아버지인 김가진이 국내에서 자금을 내어 줄 만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 그 편지를 보여 주고 자금을 받아 오는 거였다. 그는 백반물로 글을 써주었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지만 불을 쬐면 종이에 글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정화는 기막힌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주지 않고,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은 선선히 돈을 건네주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꼭 써 달라고 하면서,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가진 것만큼 겁도 많고 도리어 일제에 신고를 하겠다고 협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겁을 먹고는 당장 내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군자금을 내어 주었고 치마 속에 군자금을 숨겨서 압록강을 여섯 번이나 건넜다. 한밤중에 쪽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 건 무섭지 않았지만 일제의 탄압이 무서워 돈을 건네주지 않으려는 겁쟁이들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임시 정부 27년의 세월 동안 안살림을 책임졌다. 많은 독립투사들에게 밥도 해 주었다. 또한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도 같이 있었다. 정화는 누구의 딸,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나, 정정화라는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했던 임시 정부 시절이 너무나 좋았다. 여자는 얌전히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국내와 달리 임시 정부에서는 누구든 스스로 알아서 일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를 지켜야 했고, 또한 각자 맡은 일을 확실하게 해야만 했다. 그게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독립된 개개인들이 모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함께 보냈던 젊은 시절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고 하였다. 임시 정부 시절 김구로부터 한국의 잔다르크 라는 칭송을 받았다. 해방후 귀국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남편 김의한은 납북되었다.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고 1991년 사망하여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진정한 여장부들, 한결같이 독립운동가들은 '나' 보다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헌신하는 마음이 크다 .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고 천주교인도 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예수님의 희생정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혹자는 미국의 전적인 도움으로 우리나라가 독립을 했다고 하지만 이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과연 독립 할 수 있었을까?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치마 속에 군자금을 숨겨 압록강을 건너다
정정화

 content media
8
2
24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08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조마리아는 1862년에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 조씨 선과 원주 원씨의 3남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조마리아의 가문은 조선 선조 대 만경현령을 지낸 조복립, 효종 대 한성판윤에 오른 조관, 현종 대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은 조응건등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문과 급제가 점차 어려워지자 무과를 통해 관직 진출을 모색하였다. 조마리아는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갑내기 안태훈(1862~1905)과 혼인하였다. 안태훈의 본관은 순흥으로 안기옥 이래 무과급제자를 다수 배출하여 명망 있는 가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무반가문이라는 공통점은 두 가문의 결속을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조마리아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994~1949), 안공근(1889~1939)등 3남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구한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조마리아 가족들은 관직을 버리고 황해도 신천군 청계등, 산골 마을로 이사를 왔다. 그곳에서 자식들을 기르고 혼인도 시키고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앙심도 키웠다. 그러나 나라는 더욱 위태로워져만 갔고남편도 세상을 떠났다. 그때 항일 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에 있던 큰 아들 중근이 급히 귀국했다. "어머님, 나라를 살릴 길은 인재를 양성하는 길뿐입니다. 그래서 청계동의 가산을 팔아 학교를 세웠으면 합니다." "생각해 둔 바가 있느냐?" "천주교 본당의 학교를 인수하여 우리 민족의 인재를 키우는 학교로 운영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려무나" 그래서 가족들은 정들었던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거주를 옮기에 되었다. 진남포로 이사를 할 때, 집안 가족들만 해도 80여명이 넘는 대가족이었다. 본래 살림이 넉넉했지만, 그 재산들을 모두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에 쏟아부었다. 집안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내 한 몸 편히 살자고 하지 않았다. 그즈음 일본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손해 배상을 청구하고,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도록 우리나라에 빌려 준 돈이 무려 1,300만 원(현재 가치로 약 3,900억 원)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빚 독촉을 하면서 우리 국 민들을 경제적으로 압박하였다. 빚을 갚지 못하면 결국 일본의 종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온 나라에 가득하였다. 그러한 때에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온 국민이 담배를 석 달 동안 끊어 그 담뱃값 60전을 모아 1,300만 원을 갚아 버리자는 것이었다. 국민의 힘으로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국채 보상 운동은 양반이나 상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나랏일은 남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여인네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랏일은 양반들만 하는 거라 생각했던 민중들도 깨어났다. 담뱃값 이라는 적은 돈이 국권 회복에 큰 힘으로 보태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마리아와 아들 중근이도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중근은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연설을 하며 국채 보상 운동을 알렸다. 그러자 일본 순사가 와서 비웃었다. "조선 사람들은 하등한 인간인데, 너희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러는가?" "빚을 준 사람은 빚만 받으면 되지, 왜 그리 욕을 하시는가?" 그러자 일본 순사가 욕을 하면서 중근에게 달려들었다. 나라의 빚을 갚겠다는 이들의 의지는 강했다. 중근은 국채 보상 기성회 관서지부를 세워 국채 보상 운동을 이끌어 나갔고, 조마리아는 '삼화황 패물 폐지 부인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세 명의 며느리도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들을 모두 의연금으로 내어놓았다. 조마리아는 삼화황 패물 폐지 부인회의 여인들은 여자들의 패물로 3,000만 원을 만들어 나라의 빚을 갚음은 물론이고, 학교와 은행을 세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회원 증 패물을 차고 있다가 들통이 나면 10원의 벌금까지 받아 보상금에 보태겠다고 규칙도 만들었다. 그러나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자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다. 일본은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또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 선생이 돈을 빼돌리고 있다는 거짓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가두었다. 나라를 위해 담뱃값과 패물값으로 모은 돈을 일부의 사람들이 빼돌린다고 하는 일본의 거짓 선전에 사람들은 속고 말았다. 물론 나중에 양기탁 선생은 무죄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때는 이미 국채 보상 운동이 사그라지고 난 이후였다. 하지만 이 때 모은 돈이 이후 대학을 설립하는 기초가 된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었다. 일본의 압박과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중근은 국내에서는 더 이상 나라를 구할 활동을 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아들아, 집안일은 생각하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거라." 중근 뿐 아니라 나라의 많은 아들들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해외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여인네들은 국내에 홀로 남아 집안을 책임져야만 했다. 조마리아는 아들이 떠난 집안에서 자신처럼 남은 여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1909년 10월이 끝나갈 무렵, 아침에 신문을 보던 조마리아는 너무나도 놀랐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이토 히로부미가 남만주 철도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보면서 곧 그 땅을 삼킬 생각으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내렸을 때, 세 발의 탄환이 날아들었다. 안중근이 쏜 것이었다. 신문을 읽고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마리아는 정근, 공근 두 아들을 여순 형무소로 보내 형을 만나게 보게 했다. 중근은 처음에 두 동생들을 결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아들이 얼마나 남은 식구들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제 십자가를 건네주라고 했다. "맹세코 천주교인으로서의 자격과 신자의 도리에 추대를 보이지 않고 최후에 이를 터이니, 어머니께서는 안심하시라고 전해다오." 아들은 자신의 뜻을 전하려면 일본인 변호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변호사가 필요하니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에서는 이 일을 한 개인이 원한 때문에 일본인을 죽인 일로 처리하려고 하였다. 중근은 의군 참모중장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일본과 독립 전쟁 중이었다. 그런데도 왜 일본의 법으로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 아들의 주장대로 만국 공법에 의해 재판 받는 일이 당연했다. 먼저 우리나라 변호사를 구하는 일이 시급했다. 조마리아는 직접 평양으로 가 안병찬 변호사를 만났다. 변호사는 기꺼이 변호를 해 주려고 했으나, 일본 법원에서는 받아 주질 않았다. 오직 일본 변호사만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일본이 끝내 중근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았다. 중근은 끝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일본이 원하는 대로 재판이 진행되었다. 아들은 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재심사해달라 상고한다고 하였다. 상고를 해도 결과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중근이 목숨을 구걸한다 하겠지 어찌 그런 소리를 내 아들이 듣게 한단 말인가? 조마리아는 아들 안중근을 찾아갔다. "아들아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 다. 네가 상고를 한다면 혹여나 네가 목숨을 구걸한다고 여겨질까 두렵구나. 네가 나라를 위해 이리 이르렀으니, 오로지 천주님께 기도할 뿐이다." 그제야 아들은 어머니에게 살포시 웃으며, 눈을 맞추더니 늙은 어미의 얼굴을 만졌다. 그녀는 그 손을 지그시 누르며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새하얀 명주 천을 꺼내어 아들을 위해, 천주님께 나아갈 때 입고 갈 수의나마 지어주고 싶었다. 아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한 땀 한 땀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결심했다. 얼마 남자 않은 한 평생, 내 아들의 뜻을 더럽히지 않고 살겠노라고 식민 체제 아래서 안중근 의사 유족에 대한 일본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가족들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지자 그들은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조마리아의 집에는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찾아와 쉬었다 갔다. 조마리아는 독립운동가들의 찾아오면 언제나 따뜻하고 편안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러나 1차 대전 후 일본의 세력이 더욱 뻗쳐오며 위협을 하자 조마리아는 다시 러시아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다시 땅을 개간하여 상당한 부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교포들은 조마리아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갈등이 생길때마다 언제나 타이르고 깨우쳐서 교포들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연해주 한인신문 < 대동공보> 의 주필 이강 선생은 조마리아를 두고 "그렇게 위대한 여걸은 다시 보지 못했다. 과연 범이 범을 낳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조마리아와 안중근 의사 유족들은 상해에 있는 독립지사들에게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독립지사들을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아프면 간호해 주기도 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독립운동에 열기를 더해 주고 희망을 주고, 때때로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 조마리아와 함께 상해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것만으로도 독립지사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니
조마리아
 content media
7
0
17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05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당나귀 타고 전국을 순회한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1877~1910)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에스더는 세례명이고 남편 박유산의 성을 따랐다. 당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서구 여성의 지위를 동경해서 남편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짓는 것이 한동안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점동은 이화학당에 자주 놀러갔다. 아버지가 정동 예배당을 세운 에펜젤러 목사님을 도와주고 계셨기 때문이다. 학교 담벼락에 붙어서 보면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신기한 사람들도 있고, 공부하는 또래 여자애들도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랑 엄마는 선교사들이 애들을 잡아가서 한입에 꿀꺽한다며 못가게 하였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애들이 부르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싶어 아빠를 졸랐다. "아들도 없는데, 딸이라도 공부를 시켜볼까나?" 할머니와 엄마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화학당에서 학교에만 보내 준다면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준다고 하여 마침내 입학한다. 이화학당에 들어간 점동은 빠르게 영어를 익혔고 다음 해 18명이나 학생들이 되었는데도 가장 영어를 잘해서 에스더라는 새로운 이름도 받게 되었다. 그러다 닥터 홀 부부가 와서 여자들이 진찰 받을 수 있는 병원인 '보구여관'을 세웠고 통역을 맡은 에스더는 홀 선생님의 진료를 거들어 주게 되었다. 윗입술이 세로로 찢어진 아이의 입술을 붙이는 수술 장면을 보았고 거짓말 같이 아이 입술이 말짱해진 것을 본 아이 엄마는 기적이라고 울었고 그때 의사가 되리라 결심한다. 홀 부인은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의사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지만 집안에서는 멀리 타국에 여자애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때 예배당에 다니는 박유산 씨와 혼인을 하고 뜻에 따라,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뉴욕 퍼블릭 스쿨에서 1년, 간호학교도 6개월간 다니다가 드디어 그토록 소망하던 발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대학)에 입학한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내었지만 생활비는 부부가 벌어야만 했다 생활이 너무 힘들었지만,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공부할 수 없으리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꼭 해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자 남편이 아내가 훨씬 의지가 강하고 머리가 좋으니 두 사람 중 한 명만 공부할 수 있다면 아내가 하는 게 낫다고 식당을 다니면서 생활비를 벌어다 주었다. 그런데 마지막 졸업 시험을 치르는 동안 남편이 병을 얻어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박에스더는 남편에게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절감하고 사회에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1900년 정식으로 의사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보니,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일제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박에스더는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동대문부인병원의 전신)에서 진료를 했다. 연간 수천 명의 환자를 휴일도 없이 돌보고 평안도, 황해도 지역으로 가마를 타거나 당나귀를 타고 진료하러 다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골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진료뿐 아니라 영어교재를 한글로 번역하고 성경과 위생교육도 해가며 과중한 업무를 해나갔다. 사람들은 수술하는 모습을 보고는 귀신이 재주를 부린다고 놀라워 했다. 그녀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외쳤다. 박에스더는 또한 닥터 홀 부인을 도와 맹아 학교와 간호 학교를 세우는데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너무 쉬지 않고 일을 한 탓에 환자를 돌보는 사이 몸이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결국 30대의 이른 나이에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만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 content media
6
0
21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11월 04일
In 역사교육정책게시판
1860년 (철종11) 윤익상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76년 19세 때 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한 외당 유홍석의 장남인 강원도 춘천사람 유제원과 결혼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에 비분강개해 시아버지가 의병으로 출정하자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을 창작 보급하면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진력하였고,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데도 적극 앞장섰다. 윤희순은 처음부터 의병대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시아버지가 아기도 키워야 하고 집안 살림도 꾸려야 하고, 또 제사도 지내야한다고 말린다.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던 시절 이라 처음에는 윤희순도 그 말에 수긍을 한다. 하지만 나라가 점점 위태로워져 또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윤희순도 직접 참가를 한다. 나라사랑에 남녀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면서 여자들을 모아 '안사람 의병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군 조직을 만든다. 안사람 의병대원들은 군사 훈련도 받았지만, 주로 쇠붙이를 모아 화승총을 만들고 오줌을 모아 화약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의병 활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시아버지 유홍석은 그 자리에서 자결하려하자 윤희순은 지금 죽으면 일본만 좋은 일이지 뺏긴 나라를 어찌 찾으려 하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은 중국 만주 땅으로 건너간다. 윤희순도 곧 가산을 정리하고 뒤따라가려고 할 때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친다. 의병장이던 시아버지의 행방을 말하지 않으면 어린 아들을 죽이겠다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패면서 협박한다. 그러나 윤희순은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이라고 아들을 살리겠다고 아버지를 팔 수 없다 소리치자 그 서슬 퍼런 당당함에 일본 헌병들은 물러갔다. 중국 만주 땅에서도 윤희순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윤희순의 아들, 며느리, 조카까지 가족 모두가 독립 무장 투쟁에 앞장섰기 때문에 '가족 군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윤희순은 아직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당시 중국인들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을 함께 했던 중국인들 중에는 윤희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윤희순 개인의 삶은 고단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 훈련을 하였을 뿐 아니라, 늘 일본의 감시와 핍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 시아버지 유홍석이 세상을 떠나고 이어 남편 유제원도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아들 유돈상마저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본에게 붙잡혀 고문 끝에 숨을 거둔다. 그때 윤희순의 나이 76세였다 이국 만리 이내 신세 슬프도다 슬프도다 어느때나 고향 가서 옛말하고 살아볼꼬 방울방울 눈물이랴 맺히나니 한이로다 -윤희순의 신세타령 중 의병 활동에서 독립 전쟁까지 40여 년 한평생 항일 독립 투쟁 외길을 걸어오던 윤희순은 붓을 들어 [해주윤씨 일생록]이라는 글을 남긴다.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혹독한 고문으로 숨진 아들의 시신을 본 지 열하루 만에 윤희순도 아들의 뒤를 따라간다. 광복을 10년 앞둔 1935년 8월이었다. [해주윤씨 일생록]을 보면 "매사를 시대에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하는 말이 있다. 옳은 도리, 지금 우리 시대의 옳은 도리란 무엇일까요? 믿음을 가질 때 역사만큼 큰 울림이 있는 것은 없는것 같습니다. 문득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 매우 궁금했어요 책은 한달전에 미리 사놓았는데 이제서야 올립니다. 책에 인물들 매일 올려볼게요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
 content media
5
0
14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7월 28일
In 지적재산권산업정책게시판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에서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천자문을 모두 외웠고 '도강'이라는 종합시험에서는 장원을 자주 할 정도로 똑똑했다. 그런데 13살부터 응시했던 과거 시험에서는 매번 떨어졌고 계속 도전했지만 19살이 되던 해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 자체가 없어지자 앞길이 막혀 좌절하고 있을 때, 친한 친구였던 신긍우, 신흥우 형제가 찾아와 배재학당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유교사상이 강했던 시절이라 서양식 교육을 받는 것을 거절했지만 친구들의 끈질긴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빠른 속도로 영어를 습득하여 6개월만에 배재학당의 영어 선생님이 되었고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자유주의와 '국민은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라는 민주주의를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가 이와 같은 사상을 채택한다면, 자유를 누리지 못하던 백성들에게 큰 축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바꾼 한성감옥 고종폐위운동을 하다 1899년 1월에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갇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선교사들이 넣어준 성경을 읽고 1899년 2월 추운 겨울날, 기독교로 개종했다. 1902년 콜레라가 돌아 감옥에 있는 죄수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전심으로 돌보아 주어 한성감옥에서만 40여명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이들은 훗날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활동 3.1운동과 임시정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태평양전쟁을 예견한 책 "재팬 인사이드 아웃'(일본 내막기)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책이 출판된지 5개월 후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 미군 2,000명 이상이 죽고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져 많은 미국 청년이 묵숨을 잃게 되었다. 책의 내용대로 이승만 대통령의 예언이 맞아떨어지면서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승만을 재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덕에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과 미일전쟁에서 미국의 승리로 8.15 해방을 맞게 된다. 이승만의 오랜 세월 외교 독립 투쟁의 결과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으나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1945년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한국인이 하나로 뭉쳐 총선거를 치루고, 완전한 독립 국가를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소련이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국인이 대동단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 1946년 2월, 소련은 북한에 공산 정부를 세우며 한반도 공산화에 빠른 속도를 내고 있을 때 같은 해 6월,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라고 연설을 했다. 북한에 이미 공산 정권이 들어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반공을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산국가에서는 평등이라는 이유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적게 일한 사람이나 성과를 똑같이 나눠준다. 그럼 열심히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원시사회가 되고 만다. 그는 수많은 암살시도에도 공산국가가 될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건져내고 5.10 자유 총선거와 헌법을 만든 제헌 국회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1948년 7월 1일에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하고, 7월 17일에는 헌법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했는데, 우리가 지금 기념하고 있는 '제헌절'이 바로 그날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는 인간의 물질적 복지를 늘리고, 정신적 행복을 가져다주는 올바른 방향이었음을 보여주며 이것이 이승만의 가장 큰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나라 안팎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국가 생존을 위협받자 국가 보완법을 만들고, 친일파 청산, 이승만 라인 선포로 독도가 한국땅임을 분명히 했다. 농지개혁과 교육개혁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모두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는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했다. 그 결과 취임 당시, 학교에 가봤던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14%정도였는데, 정권이 끝날 무렵에는 취학률이 96%까지 올라가는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전쟁중에도 펼쳐서 해방 직후 80%에 이르던 문맹률이 1958년쯤에는 4%대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시작을 만들었다.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이승만 반공포로석방,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한미상호방위조약(한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미국과 맺은 군사 동맹으로 미군을 최전방에 배치하여 북한이 남침할 수 있는 24개 길목을 지키게 하고 미국은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해외에 주둔한 미군이 공격당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하고 북한과 미국의 전쟁으로 생각하고 싸우게 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북한이 다시 남침하지도 어떤 나라도 우리나라를 쉽게 여기지 못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조약으로 미국은 한국에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했고, 각종 기술까지 무료로 제공하였다. 전쟁이 없는 기간 대한민국은 경제, 군사,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한미동맹 후세에 남긴 값진 선물 북한의 대남 전략 중 70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것 첫번째 목표는 바로 '미군 철수'다. 위험천만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니, 한국 땅에서 미군만 떠난다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요즘은 말을 살짝 바꿔서 "정전협정 폐지하고 평화협정 맺자! 우리 민족끼리 하나 되자"라고 한다. 평화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전쟁 안 하기로 했으니 미군은 떠나라"라는 뜻이다. 사실 "공산화하자, 미군 철수해라, 평화협정 맺자"라는 건 다 똑같은 말이다. 그래서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의 전략은 이승만을 끊임없이 깎아내리는 동시에 '미군 철수, 평화협정'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의 전략은 꽤나 성공해서 우리는 이승만 하면 바로 독재자, 부정선거의 원흉을 떠울리게 됐다. 실제로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그가 잘한 일은 전혀 말하지 않고, 잘못한 것만 과장하고 있으니 역사가 많이 왜곡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자원 없는 전쟁 폐허에서 시작한 원자력 발전 1956년에 에너지 전문가인 시슬러를 만나게 되어 무한한 에너지인 원자력에 눈을 뜬 이승만은 우수한 과학 인재들을 모아 1인당 6,000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국비 유학을 보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 남짓하던 시절이었고, 나라에서 20달러 이상의 외화를 지출할 때는 본인이 직접 서명할 정도로 달러를 아꼈던 이승만에겐 엄청난 투자였던 것이다. 1956년에 첫 국비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고, 이후 4년 동안 8차에 걸쳐 150여 명이 유학을 마쳤다. 그렇게 1959년 7월, 국내 최초로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시작하는데, 기공식에는 이승만도 직접 참석했다. 원자로 건설에는 73만 2천 달러라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고 미국과 협상을 하여 두 나라가 반반씩 지출하여 건설하기로 했다. 물론 35만 달러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난한 나라에서 최첨단 미래 에너지 기술을 도입하고자 나선 것이다. 1978년, 드디어 국내 최초 원전 고리 1호기가 가동됐고 시슬러에게 "원자력을 사용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라고 물었을 때, "한 20년 걸릴 것이다"라고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고리 1호기가 가동되고 32년 후인 2009년엔 우리나라 처음으로 아랍메미리트 연방(UAE)에 원전을 수출했다. 나무 없는 민둥산을 푸르른 산으로 이승만은 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는 것을 권장하기 위해, 4월 5일을 식목일로 지정하여, 1949년부터 2005년까지 공휴일로 지켜왔다. 나무를 아무리 많이 심어도 다 베어 쓰면 소용없음을 깨닫고, 연료를 목재에서 무연탄으로 바꾸는 정책도 추진하여 전체 에너지 소비에서 나무 땔감이 차지하던 비중이 1950년대에 90%를 웃돌다가 1990년대에는 1% 이하로 떨어진 통계를 보면, 연료 전환 정책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승만 라인(평화선)으로 영해와 독도를 지켜내다 1952년 1월 이승만은 미국와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도를 포함하는 해양 경계선을 일방적으로 그어버렸다. 그리고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에 한발 먼저 등대를 세우고 군부대를 주둔시켰다. 일본은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며 없앨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미국과 대만까지 이승만을 비난했지만 그는 끄떡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평화선'으로 불렀다. 1954년 1월, 평화선 선포 2주년을 맞이해 독도에 '한국령'이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실효 지배함으로써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탄생한 자유 시장 경제체제, 1차 개헌(1952)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루고, 2차 개헌(1954)으로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확실히 했다. 1948년 나라를 세웠지만 불완전한 상태였던 대한민국은 두 차례 개헌을 거쳐 완전한 독립을 이룬 어엿한 자유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오늘날 세계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3월15일 선거 당일, 자유당 결국 전국적으로 투표함을 바꾸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전국적으로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선거 당일에만 10여 명이 죽고, 60여명이 다쳤지만, 이승만 주변 각료들은 이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전국이 시위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던 4월 19일까지도 간신배들은 허위 보고를 하고 있었고 많은 업적을 이룬 건국 대통령의 마지막을 얼룩지게 만들었다.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사태는 커졌고, 4월 21일이 되어서야 이기붕 일당은 비로소 사실대로 말하고 전원 사표를 냈다.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들의 사표를 받고 나서야 무엇이 잘못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됐다. 대통령이 아닌 부통령의 3.15로 부정선거와 국민과 소통하지 못한 4.19혁명으로 "국민이 원한다면 내려와야지, 그게 우리 민주주의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하야했다. 퇴임 후, 각국 대표들로부터 위로 편지를 많이 받았던 이승만은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라고 답장했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 이기붕의 욕망을 방치했던 것과 국민의 안위를 살피지 못했던 책임을 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했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하야 후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죽어서야 귀국의 승낙을 받고 그의 유해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수십만의 국민이 나와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진리다.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라를 위해 애쓰고 수고하고 때로는 목숨을 바쳐 수호한 분들의 업적과 공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근대사에 이승만 같은 대통령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자유와 풍요로움은 결코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지도자를 예비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다 쓰려고 했다. 지금 현재와 비교하면서 보면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역사교과서가 심히 좌편향 되고 다음 세대들이 한국민족이란 자긍심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지 못하도록, 쓸모없는 나라의 별볼일 없는 국민이란 이런 민족성을 더이상 심어주지 않도록 부지런히 배워서 가르쳐야 주어야만 이 마지막 때에 거룩하고 찬란하게 쓰임받는 민족이 되지 않을까? 모든 국민이 읽어봐야 할 '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 강력 추천합니다.
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
 content media
9
10
58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7월 24일
In 영화산업진흥정책게시판
개봉 2009. 01. 15. 등급 전체 관람가 장르 다큐멘터리, 가족 국가 한국 러닝타임 75분 배급 인디스토리 소개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노인에겐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그런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이 소는 최노인의 베스트 프렌드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이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 소리도 귀신같이 듣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른다. 심지어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략을 치지 않는 고집쟁이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최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른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환상의 친구다. 그러던 어느 봄, 최노인은 수의사에게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거라는 선고를 듣는다. 수상내역 2010 7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최고의 작품상, 최고의 포스터상) 2009 7회 자그레브 영화제(최우수 다큐멘터리상) 4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신인감독상) 12회 시네마비엔터 환경 영화제(국제 다큐멘터리 경쟁) 2008 34회 서울독립영화제(관객상) 13회 부산국제영화제 (비프 메세나상) 감상평 20대 초반에 예수님을 만나고 어느날 담임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으며 '황소같이 일하리라'라는 얘기를 들었다. 몸도 약하고 피곤도 잘 느끼는 저질체력인데 황소라니 잘못 들었나?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워낭소리]가 개봉된 날, 소의 일생을 보니 황소같이 일한다는 의미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소의 수명은 15년이라는데 최노인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자란 [워낭소리]에서 나오는 소는 무려 40년 동안의 일생을 살았다. 최노인이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고, 언제나 소를 위해 애정을 듬뿍 담아 만든 소죽이 소의 수명에 영향을 끼쳤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경우엔 어릴적 시골에서 보던 '쇠죽'이라는 짚을 일일이 작두로 잘라 콩깍지, 쌀겨, 호박, 고구마 등 웰빙재료를 넣어 가마솥에 끓이던 구수한 냄새가 주로 떠오르곤 한다. 주로 삼촌이 이 일을 감당했는데 매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끓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최노인이 그 힘든 일을 소를 위해 40년간 해왔으니 몸도 많이 상하고, 덥거나 추운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도 농약 한 번 치지 않은 재료들을 엄선해서 만들었으니 소가 평균 수명 이상으로 살아온 건 어쩌면 당연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영화에 진심으로 감동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최노인의 지극한 보살핌과 그 보살핌을 받으며 40년을 살아온 소의 일생 정도가 아니다. 소의 수명을 늘려준 이유가 쇠죽이었을 거란 생각도 들지만 평생을 주인을 위해 논밭을 갈고 늙어서는 잘 걷지 못하는 다리로 눈을 감기전까지 겨우내 두 노인이 쓸 장작을 마당 가득 쌓아주고 가는 소의 일생을 보니 '죽기까지 충성하라' 는 성경 말씀이 떠오르며 가슴이 먹먹해 오고 주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셨는지 그제서야 알았다. '죽기까지 충성하라' 어찌보면 무겁고 두려운 말씀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두려워만 할 수는 없으며, 내게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 기꺼이 해내야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영화를 통해서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놀랍지 않은가? [워낭소리]란 영화의 감동은 나의 과거와 현재 앞으로 미래에도 인생에 꼭 필요한 소금이었던 것이다. 더운 여름, 자칫 불쾌지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겠지만 이런 좋은 한 편의 영화로 힐링되는 주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9. 최고의 영화 워낭소리 content media
6
10
41
miracle
백서스클랜
백서스클랜
2021년 7월 23일
In 지적재산권산업정책게시판
1809년 2월 12일 주일 날, 가족들의 축복 가운데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이 태어났다.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아버지와 인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 누구보다 따뜻하고 이해심 많은 누나 사라가 있어서 링컨은 행복했다. 1818년 10월 5일, 링컨이 10살 되던 해 풍토병을 앓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이렇게 유언했다. "사랑하는 에이브(링컨의 애칭)야! 이 성경책은 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내가 여러 번 읽어 많이 낡았지만 우리 집안의 값진 보물이란다. 나는 너에게 100에이커의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에이브야! 너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약속할 수 있겠니?" 링컨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의 유언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그 약속을 지킬 것을 굳게 다짐했다. 1년후 아버지가 재혼 후 새어머니 또한 신앙심이 깊었던지라 링컨에게 6km나 떨어진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으며 링컨은 쓰기, 읽기, 산수 뿐 아니라 글쓰기에 놀랄만한 재능을 보였다. 또한 탁월한 언변의 은사를 발견하고 윌리엄 스콧이 쓴[웅변 연습하기]란 책을 선물해 주었다. 이 책은 링컨이 정치가로서 대중들 앞에서 어떻게 연설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 책이었다. * 7전8기의 믿음 그가 겪은 사업과 선거의 실패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831년- 23세에 사업 실패. 1832년- 24세에 주 의회 의원 낙선 1833년- 25세에 사업 실패 1838년- 30세에 의회 의장직 낙선 1840년- 32세에 대통령 선거위원 낙선 1844년- 36세에 하원의원 공천 탈락 1855년- 47세에 상원의원 낙선 1856년- 48세에 부통령 낙선 1858년- 50세에 상원의원 낙선. 이렇게 보면 링컨의 인생은 정치가로서도, 사업가로서도 실패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링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선거에서건, 사업에서건 실패할 때마다 주저앉지 않고, 실패라는 장애물을 디딤돌로 바꾸려는 노력을 게을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오뚝이처럼 넘어질 때마다 잽싸게 털고 일어났고, 자신의 넘어진 자리를 돌아보고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며 다음 선거를 준비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신앙의 지도자였음을 입증하는 가장 분명한 사례를 꼽는다면, 단연 '금식기도일 선포'일 것이다. 링컨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온 국민과 더불어 금식하며 기도했다. 국가적인 '금식 기도일'이 선포되기 전까지만 해도 링컨이 이끄는 북군(연방군)에는 전쟁을 책임지고 지휘할만한 유능한 장군이 없어 전세가 계속 불리했었다. 북군과 남군의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링컨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혼자만 기도하기보다 전 국민이 함께 금식하며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노예들이 해방되고 남과 북이 하나 되는 일은 링컨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야 될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링컨은 1863년 4월 30일 목요일을 '금식 기도일'로 선포하고 온 국민들에게 함께 금식하며 기도할 것을 호소했다. 링컨은 국민들과 함께 금식하고 기도함으로써 두 개(남부 동맹11개 주와 북부 동맹 22개 주)로 나뉠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하는 통일 대통령이 되었고, 노예들에게 해방을 안겨 주어 노예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기도하는 대통령이 절실한 지금, 뭔가 모델이 될만한 인물 중에 링컨이 생각났습니다. 링컨의 위대한 업적도 칭찬할만 하지만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과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는 것도 큰 감동입니다. 특히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도 공금은 1센트도 소홀히 하지 않은 그의 정직성은 본 받을만 합니다. 부디 절체절명의 대한민국에 이런 준비된 대통령이 나와서 나라를 원상복귀 시키고 부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 content media
9
8
48

miracle

백서스클랜
+4
More actions
bottom of page